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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온통 붉은 숲, 붉은 진지로 뒤덮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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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총궐기
등록일
2017-04-17 03:53:43
조회수
2460
대한민국이 온통 통혁당 20년 복역 신영복 만세 붉은 숲, 붉은 진지로 뒤덮혔읍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입니다.








* [ 20년 복역 통혁당 무기수 신영복 ]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무기징역형 선고, 20년 복역


".... 나는 군법회의 1·2심에서 사형선고 받고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고법에서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습니다 ......"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20년간 복역.



1996.8. 신영복 -- 월간 말 -- 이광재


[ 신영복은 " 근본적인 원칙을 폐기하는 성급한 청산주의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고 말합니다. ]


월간‘말’ 1996년 8월호(글/김경환 기자, 사진/박진희 기자)


*1992 조유식 말지기자 민혁당, 김영환과 잠수정 입북
*1995 이광재 월간말지 기획위원
*1999 김경환 민혁당 4년 6월 선고




2000년 [ 송두율교수 귀국추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읍니다. ]



2001-03-28 [ 신영복은 자본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7151








2016.1.16. 더불어민주당



[ ...... 분단된 조국에서 군사 독재에 저항하다 스물일곱 청춘의 나이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감옥에 갇힌 ........

....... 두려움 없이 군사 독재와 싸웠고 두려움 없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



......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시켰습니다 .......... ]




[논평] 우직하게 조금씩 세상을 변화 시키겠습니다


2016-01-16



우직하게 조금씩 세상을 변화 시키겠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분단된 조국에서 군사 독재에 저항하다 스물일곱 청춘의 나이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감옥에 갇힌 고인의 삶은 슬프고 비극적인 우리 현대사의 굴곡, 그 자체였습니다.


고인은 강산이 두 번 변하는 20년 세월동안 불굴의 의지로 한 평 좁은 감옥 안에서 끝없는 사색과 공부를 했고, 출소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글과 강의로 젊은이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며,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분이셨습니다.
두려움 없이 군사 독재와 싸웠고 두려움 없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던진 가르침, 굽힐 줄 모르던 의지는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2016년 1월 16일

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 강선아


http://npad.kr/briefingDetail.do?bd_seq=51704








[ ..... '더불어민주당' 당명 .... 신 교수의 '더불어숲'에서 '더불어'를 따왔다 ........ ]




[ ...... 문재인 대표는 .... 신영복 선생님은 ... 다 함께 정권교체 꼭 해내자고 격려 .......

...... 선생님이 제게 써주신 '처음처럼'과 노무현 대통령에게 써주신 '우공이산'은 저의 정신이 되고 마음가짐이 됐다 ......... ]




野 '故신영복의 추억' 당명, '더불어숲' 되라는 고인 선물

뉴미디어뉴스국 2016-01-16



문재인 '처음처럼', 저의 정신이 돼…소주한잔 올린다

안철수 오늘 조문 예정



야권 인사들은 16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자로 유명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별세 소식에 저마다 고인의 삶을 떠올리며 한목소리로 애도했다.


특히 최근 개정한 당명인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가 신 교수의 저서 '더불어숲'에서 기인한 표현이었던 사실이 뒤늦게 회자되면서 신 교수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신 교수는 생전에 적지 않은 야권 인사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 묘비문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글귀도 신 교수의 '작품'이다.



더민주 문재인 대표는 페이스북 글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대선패배에 누구보다 아파하시고, 다 함께 정권교체 꼭 해내자고 격려해주셨던 분이라며 선생님이 제게 써주신 '처음처럼'과 노무현 대통령에게 써주신 '우공이산'은 저의 정신이 되고 마음가짐이 됐다. 선생님께 소주 한잔 올린다고 추모했다.

문 대표는 지난 대선 이후 신 교수와 가끔 만나 조언을 구한 사이로, 17일 서울 성공회대에 마련된 빈소를 찾을 것으로 알려졌다.



홍보전문가 출신의 손혜원 홍보위원장은 2006년 소주브랜드 '처음처럼'을 만들 때 고인의 서체를 활용해 그의 글씨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장본인이다. 손 위원장은 1990년대 말 강연 모임이던 '더불어 숲'에서 고인과 첫 인연을 맺은 뒤 직접 서예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손 위원장은 저는 그 분의 서체를 정말 좋아했다며 고인에게 요청을 드려 시서화를 받았고, 그 글씨 중 '처음처럼'을 브랜드로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선생님의 가르침이 더욱 필요한데…이렇게 황망하게 떠나시니 마음이 미어집니다라고 썼다.



손 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의 당명에도 고인의 흔적이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더불어민주당' 당명 응모자가 제안 설명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글처럼 힘든길, 산길을 가도, 더불어 가면 길이 생긴다는 것이라며 신 교수의 '더불어숲'에서 '더불어'를 따왔다는 것이다.


손 위원장은 1등 하신 분이 제출한 당명 설명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는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였다며 눈이 선하다고 문재인 대표를 좋아하셨던 신영복 선생님께서 '더불어 숲'이 돼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우리에게 큰 선물 '더불어'를 주고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SNS에도 고인을 추모하는 야권 인사들의 애도글이 이어졌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제가 대북송금특검으로 구속됐을 때 읽고 또 읽었다고 했고, 이석현 국회 부의장은 시대의 양심적인 지식인, 영면하소서라고 글을 남겼다.


분당 국면에서 거취를 놓고 막판 고심 중인 박영선 전 원내대표는 트위터글을 에서 성공회대의 더불어숲 강의에 다녔던 나에게 신영복 선생님은 '얼마나 힘들어요' 하시면서 서예를 권하며 붓 잡는 법을 가르쳐주셨다며 먹을 가는 단아한 마음, 금처럼 제련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고인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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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노회찬 전 대표는 선생님의 뜻과 정신은 낡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진보의 미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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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news.imbc.com/news/2016/culture/article/3861011_19794.html








2016.1.15. 민주노총 -- 신영복



[ ..... 불의한 권력에 맞선 청년이었고 투사였다. ........

...... 그는 착취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의 선생이었고 ....... ]


[논평]


시대를 밝힌 촛불 하나 꺼지다. 신영복 선생 소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시대를 일깨웠던 신영복 선생이 별세하셨다.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는 그의 성찰은 사람을 향한 사색의 발원지였으며 척박한 세상을 적시는 꿀이었다.


그는 한 때 불의한 권력에 맞선 청년이었고 투사였다. 20년이 넘는 감옥의 혹독함도 그를 이기지 못했으며, 화려한 세상의 욕망도 그를 흔들진 못했다. 그는 착취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의 선생이었고, 동요하는 군상들 모두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 시대가 잃어버린 어떤 선각자처럼 그의 죽음은 우리 시대의 상실이다. 세상은 이제 어디에 기대 사색하고, 무엇을 좌표로 사람을 향해야하는가.


사람들은 아직 그의 말을 기다리는데, 오늘 그는 훌쩍 우리 곁을 떠났다. 시대를 밝히던 촛불 하나가 또 꺼졌다. 세상은 더 어두워졌고, 민중은 더 쓸쓸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소천, 하늘이 그를 불렸다면 천국도 팍팍하긴 마찬가진가 보다.


2016. 1. 15.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http://nodong.org/statement/7047742








2016.1.20. 손석희



[ ...... 오늘(20일)은 다시 신영복 선생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 ]




[앵커브리핑] '한 알의 외로운 석과'

[JTBC] 입력 2016-01-20



뉴스룸 앵커브리핑을 시작합니다.

오늘(20일)은 다시 신영복 선생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석과불식. 씨앗이 되는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고 신영복 선생이 "20년을 의지한 희망의 언어"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한 알의 외로운 석과. 씨 과실은 오래도록 견디고 남아, 바야흐로 산야를 뒤덮는 거대한 숲을 이뤄낸다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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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155502







2016.1.22. 한겨레



[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혁명적 인간의 글모음”이었다. .........

...... 이제 그가 남겨놓은 ‘희망의 원리’를 진보의 도구로 벼리는 일은 남겨진 우리들의 몫 ........ ]



[ ....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적 인간의 글모음”......

.....그의 반자본주의적인 입장은 여전히 또렷했다. ..... ]




신영복, 그는 본디 붉은 경제학자였다

2016-01-22



[토요판] 커버스토리 / 신영복의 학문 궤적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 공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 과정이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본축적 과정의 전형적 형태입니다.”(신영복, <강의>)



동양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시서화에 능한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신영복은 본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규명하는 정치경제학자였다. 그는 대학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서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가장 정합적인 실천과학’으로 받아들이며 정치경제학을 자기 학문의 밑절미로 삼은 ‘붉은 경제학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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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여긴 박정희 군사정권 치하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제3세계의 급진적 지식인이 설 곳은 많지 않았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숙명여대에서 후진국개발론을 강의하며 학생운동 서클 간부로 활동하던 신영복은 남한사회 반체제운동의 주류로 자리잡아온 엔엘(NL·민족해방주의) 노선에 기초한 혁명조직인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20년 20일 동안 영어의 몸이 됐다. 역설적이게도 그 잔인한 세월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그를 인문학적 사상가로 거듭나게 한 시간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감옥은 그에게 또다른 ‘학교’였다.



고전·서예 능통한 인문학자 신영복
원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변화 도구로 인문학 일깨운 징역
낮은 데서 깨친 인간에 대한 이해
정치경제학에 인문학 더한 ‘관계론’
관념화·교양화 등 비판 나오기도
“외연 확대 중요하다”던 그의 담론
진보의 도구로 만드는 건 우리의 몫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1988년 가석방될 때까지 그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동양고전이라는 숫돌에 자신의 칼이었던 정치경제학을 벼리고 또 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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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서늘한 각성의 정수를 모아놓은 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사색>)이었다. <사색>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그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적 인간의 글모음”이었다. “이 사실을 놓치면, 그것은 이 책을 한낱 지당한 ‘공자님 말씀’들로 이루어진 인생론집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된다”는 지적(김명인)은 그래서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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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전을 통한 인간 사랑이 그를 초월적인 달관의 경지로 이끌진 못했다. 2004년 <주역>에서 법가까지 자신의 동양고전에 대한 해석을 담은 <강의>를 펴내며 근대의 존재론적 인식을 넘은 관계론적 철학을 이야기할 때도 그의 반자본주의적인 입장은 여전히 또렷했다.



고전을 알기 쉽게 소개시켜주는 지혜로운 인문주의자나 소주병에 글씨를 쓴 탁월한 서예가로만 신영복을 기억할 수는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에게 인문학은 정치경제학 인식을 실천으로 매개할 하나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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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가 남겨놓은 ‘희망의 원리’를 진보의 도구로 벼리는 일은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727533.html








2016. 4. 19. 이재정 경기교육감



[ ......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혁명의 불꽃을 보여 주셨습니다 ........


..... ‘변방’에 있던 ... 성공회신학교는 ........

...... 선생님은 성공회대학교를 사람이 만들어가는 ‘더불어 숲’으로 변화시켜 ......... ]



[ ...... 선생님은 여전히 역사의 스승으로, 시대의 지성으로 우리들을 계속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 ]




2016. 4. 19. 이재정 경기교육감이 신영복 선생을 애도하며… : 책 : 문화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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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대표작처럼 되어버린 ‘처음처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처음을 다시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처음처럼’은 어떤 역사의 현장에서도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결연한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처럼’에서 시작된 선생님의 인문학은 변방으로부터 불어오는 변화의 열정과 움직임을 밝혀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역사의 변화가 중앙이 아니라 변방에서부터 새로운 바람으로 불어 왔다는 역사의 교훈을 가르치시면서 변방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 주셨습니다. 변방은 자유롭고 새롭게 자기의 길을 만들어 가고 그 길들이 어울려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곳이고 변화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 인문학은 선생님이 곳곳에 여러 모양으로 남기신 서화를 통하여 때로는 새로운 역사인식을, 때로는 삶의 희망을, 그리고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혁명의 불꽃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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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1988년 20년의 긴 형기를 마치고 가석방된 뒤 이룩한 가장 중요한 일들 중의 하나는 성공회대학교였습니다.


서울의 끝자락 ‘변방’에 있던 당시 대학에 준하는 각종학교였던 작은 신학교에서 선생님은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셨습니다. 성공회신학교는 1993년 서울에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대학으로 발전하였고 1994년에는 성공회대학교로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젊은 대학’이라는 기치 아래 다른 대학들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학과 다른 대학을 만들려는 노력이 공감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위대하게 기르기보다, 열사람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으로 기르는 교육”을 가치로 내세웠습니다. 선생님은 성공회대학교를 사람이 만들어가는 ‘더불어 숲’으로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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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이제 긴 여행을 떠나십니다. 어떤 장벽도 없는 그리고 어떤 폭력도 없는 그런 평화의 영원한 세계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전히 역사의 스승으로, 시대의 지성으로 우리들을 계속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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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경기도교육감/성공회대학교 초대 총장

http://www.hani.co.kr/arti/PRINT/726531.html 2/3







* 2014.6.



[ ..... 17개 시·도 교육감 선거 결과, 13개 지역에서 ‘진보 교육감’이 ...... ]


진보 교육감 13곳 당선 역대 최다…전교조 지부장 출신 7명
2014.06.05

http://www.hani.co.kr/arti/politics/administration/640906.html






* 2012.7.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신영복 논란

http://www.hangyo.com/news/article.html?no=4028








2017.1.15.



[ ..... '더불어 숲, 이제 이뤄지고 있습니다' .......


..... "신영복 정신으로 '더불어숲'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자 ......... ]





고 신영복 선생 1주기, 문재인-안희정 ‘정권교체’ 역설

문재인 “촛불과 더불어 정권교체”
안희정 “더불어숲 만들어 새로운 대한민국”



최지현 기자

발행 2017-01-15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1주기 추도식이 15일 서울 성공회대 성미가엘 성당에서 열렸다. 추도식에 참석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안희정(더불어민주당) 충남도지사는 고인의 정신을 기리며 '정권교체'를 역설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추도사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당명이 신영복 교수의 '더불어숲'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문 전 대표는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하면 강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며 "요즘 촛불집회가 보여주고 있지 않나. 촛불 하나하나는 가냘프지만, 많은 촛불이 모이면 세상을 바꾸는 도도한 힘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선생님 뜻대로 많은 촛불들과 함께 더불어 정권교체를 하고 세상을 꼭 바꾸겠다"며 "내년 2주기 추도식 때는 선생님이 말씀했던 '더불어 숲, 이제 이뤄지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안희정 지사는 "정치에서 제 스승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지만 사상과 지혜의 스승은 신영복 선생"이라며 "신영복 정신으로 '더불어숲'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자는 다짐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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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icrosofttranslator.com/bv.aspx?from=&to=ko&a=http%3A%2F%2Fwww.vop.co.kr%2FA00001111921.html









* 더불어 숲



[ ....... 저의 숲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론’과 같은 의미입니다 .........

...... 진지를 만들어서 버티자는 얘기에는 도처에 숲을 만들어서 힘도 기르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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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에게 숲이란 단어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신영복‥개인이 반성해야 할 부분은 머리입니다. 기존 지배 이데올로기를 학습하고 포섭해서 수용하는 형식으로 자기 의식이 결정됩니다. 그 의식을 성찰해서 자기 주체 의식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쿨 헤드’(차가운 머리)를 ‘웜 하트’(따뜻한 가슴)로, 즉 인간적으로 완성해내는 게 필요합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롱기스트 저니(longest journey·장거리 여행)’입니다.


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개인은 나무입니다. 전 삶의 현장으로서의 숲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숲은 다양성입니다. 화폐적 가치라는 단일한 가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질적으로 동질화하는 근대성에 대한 성찰의 화두로 숲을 내세웠습니다.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 전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도 공존하는 질서가 진보한 문명의 형태입니다.



또 저의 숲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론’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람시는 완고한 유럽 보수주의 벽 앞에서 아픔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진지를 만들어서 버티자는 얘기에는 도처에 숲을 만들어서 힘도 기르고 그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위로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실천적 의미도 있습니다. 숲은 근대성의 패권적 논리를 성찰하는 문명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인간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키워내는 진지의 운동론적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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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9281739451&code=210000

경향 60돌]신영복 교수 “지배구조 고착으로 과도한 대립·갈등 표출”

200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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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구사회 ... 국가 ... 주변에서는 시민사회로서 참호가 둘러싸 .... 기동전으로 당당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하나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 ....... ]



안토니오 그람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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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이탈리아어: Antonio Gramsci, 1891년 1월 22일 ~ 1937년 4월 27일)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반 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 지식인, 정치인 그리고 지도자와 사상가였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며 한 때 지도자이기도 하였으며,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서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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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는 1926년 1월, 프랑스 리옹에서 비밀리에 열린 전당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공산당 총서기로 승인돼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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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경우 혁명적 세력이 강제기구인 국가를 파괴/점령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기동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경우, 핵심에는 국가기구로서 국가가 있지만 그 주변에서는 시민사회로서 참호가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기동전으로 당당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하나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으로서 장구한 시간이 필요하다. 러시아 볼세비키의 혁명전략이 왜 서구사회에 적합하지 않은지를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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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이 온통 통혁당 20년 복역 신영복 만세 붉은 숲, 붉은 진지로 뒤덮혔읍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입니다.









[ ..... 중앙정보부는 암호를 해독하여,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을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 ...... ]




통일혁명당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통일혁명당 사건은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지하당조직사건이다. 158명이 검거되어 50명의 구속자를 낸 1960년대 최대의 공안 사건으로 김종태를 비롯한 주범들은 사형을 당했다.[1]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종태가 전후 4차례에 걸쳐 북괴 김일성과 면담하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 합법화하여 반정부·반미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라고 발표했다.[1]



개요[편집]



통일혁명당은 김종태가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령·자금을 받고 결성된 혁명 조직이었다. 통혁당은 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주범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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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2]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을 하다가, 구속되었던 신영복은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3] 중앙정보부는 암호를 해독하여,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을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하였고,[4]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박성준은 자신의 처 한명숙을 포섭하는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류낙진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이후 2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모두 158명이었으며, 이들 중 73명이 송치되었고, 23명은 불구속되었다. 무장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과 권총 7정 및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더 1대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여 달러와 한화 73만여 원 등이 압수되었다.[5]



김종태가 사형을 당하자 김일성은 그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해주사범학교를 김종태사범학교로 개칭하였다.


신영복은 사상 전향을 하여 1988년 출소하였다. 그러나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영복은 전향서는 썼지만,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통혁당에 가담한 것은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고 향후로도 양심에 따라 통혁당 가담 때와 비슷한 생각으로 활동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6]








[ ..... 金鍾泰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 .....


..... 밀입북한 金鍾泰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김일성(金日成)과 만나기도 ...... ]




北은 통혁당-민혁당을 이렇게 지도했다


뉴데일리 (뉴스) 2012.05.20



北대외연락부(現 225국), 통혁당-민혁당 지도조직

김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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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향한 거물간첩 金用珪(김용규)씨는 자신의 저서인《소리없는 전쟁》과 《時效人間》을 통해 통혁당 조직이 북한 노동당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金씨는 두 책에서 “통일혁명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임자도에서 면장을 지냈던 지방유지 최영도가 甥姪(생질)인 남파 공작원 김수영에게 포섭되면서 시작됐다”고 밝히고 있다.
최영도는 세 차례에 걸쳐 평양을 다녀오면서 노동당에도 입당을 한다. 전남도당 책임자가 된 최영도는 지하당 조직망을 확산하는 한편 과거 남로당에서 전남도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수사기관에 체포돼 10년형을 살고 나온 정태묵을 다시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북한은 최영도의 조직을 전라남도 지도부의 正(정)조직으로, 정태묵의 조직은 후보조직으로 이원화시켜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해나갔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 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생질인 김수영을 내세워 김종태(金鍾泰)를 포섭하기로 한다.


反정부 감정을 갖고 있던 金鍾泰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포섭은 쉽게 이루어졌다. 평양으로 밀입북한 金鍾泰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김일성(金日成)과 만나기도 했다. 간첩 교육을 받은 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金鍾泰는 김질락, 이문규, 이XX, 임XX 등 친척, 친우 등 측근들을 손쉽게 규합해 통혁당 서울시 지도부를 구성했다.


金용규씨는 자신의 책에서 북한이 통혁당 재건을 위해 계속 공작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73년 7월에는 자신이 직접 통혁당 재건 공작계획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함께 적고 있다. 포섭대상은 과거 金鍾泰와 연계되었던 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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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ann.news.nate.com/info/253620550










[ ..... 북한 당국은 각지에 빈소를 ... 직장 주민들이 1분간 작업을 멈추고 남쪽을 향해 묵도(묵념) .......


..... 북한은 전국적 범위에서 이들의 사형을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 ]






北 '통혁당 장례식' 國葬으로 치렀다


[탈북 기자] 장례식날 1분간 묵념…'공화국 영웅' 칭호 받아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 2006-10-30 x




1968년 적발된 남한의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북한에도 잘 알려져 있다.

김종태 최영도 등 통혁당 주모자들이 남한에서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북한당국이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공화국 영웅' 칭호와 '조국통일상' 등 각종 명예를 수여했기 때문이다. 북한주민들은 통혁당 사건을 남한의 '간첩단 사건'이 아니라 '남조선 파쇼분자들에게 희생된 남조선 혁명가 탄압사건'으로 알고 있다.



통혁당 사건과 관련해 당시 남한당국은 관련자 158명을 검거하고, 1969년 1월 25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상의 간첩죄, 내란음모죄 등을 적용,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 5명은 사형, 신광현 등 4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21명은 최고 15년에서 최하 3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은 '4.19 혁명' 직후 대남 통일전선 조직을 총괄하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구성하고, 남한내 지하당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김종태를 주모자로 하는 당조직을 만들었다.


통일혁명당은 당시 지식인, 학생, 청년 등과 전(前) 남로당 당원을 포섭하여 결정적 시기에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결행할 것을 기도했으나, 통혁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활동이 드러남으로써 사전에 발각되었다.


김종태는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를 맡고 이문규(조국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민족해방전선 책임자), 최영도(전라남도위원회위원장), 정태묵, 윤광수 등이 활동한 통혁당은 분명한 북한 노동당의 지하당 조직이었다.




통혁당 창당 기념일 맞아 해마다 추모모임



북한당국은 김종태 최영도 등이 사형되자 이들에 대한 장례식을 빨치산 투사들과 똑같은 격에 맞추어 '국장'(國葬)으로 진행했다. 북한 장례식으로는 최고 영예다.


북한당국은 추도모임을 전국적으로 갖고, "김종태 동지는 미제 식민지 통치에서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조국통일위업을 위해 싸우다 체포되어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전했다.



당시 북한 당국은 각지에 빈소를 만들어놓고 각 기업소 직장 주민들이 1분간 작업을 멈추고 남쪽을 향해 묵도(묵념)하게 했다. 동시에 기차와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게 했다.



김종태를 비롯한 통혁당 지하당원들이 체포되자, 북한은 전국적 범위에서 이들의 사형을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열고 그들의 사형을 막아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김종태는 사형집행 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고, 그가 죽은 해인 1969년 평양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전기기관차 공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해마다 통혁당 창당 기념일을 즈음해 추모모임을 가지고 있다.



또 통혁당 관계자들의 활동을 '김일성혁명역사' 교과서에 '조국통일을 위한 남조선 혁명가들의 투쟁'이라는 한 개 절로 만들어 통혁당 건설과 최후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 교과서는 "통일혁명당은 조선노동당의 붉은 혈통을 이어받아 남조선에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전위부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김종태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의 지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마치 남한에서 주체사상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조직을 결성한 것처럼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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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500&num=31654











[ ....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 ........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 ...... ]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8435


2006-04-06



'통혁당'은 北 지령받은 비밀 지하당 조직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의 국무총리 지명으로 韓 의원의 남편 박성준 씨가 연루됐던 것으로 알려진 68년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통혁당 사건은 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통혁당은 김종태(金鍾泰)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김질락(金瓆洛)·신영복(申榮福) 주도의 ‘민족해방애국전선’과 이문규(李文奎)·이재학(李在學) 주도의 ‘조국해방전선’ 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통해 공산혁명을 획책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北지령받는 지하당이 분명” 주범 김질락



통혁당은 북한과 연계된 지하당이었다. 주동자였던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越北)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통혁당 하부선이었던 이진영·오병헌은 68년 4월 22일 월북(越北)해 교육을 받던 중 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귀환하지 않았다.


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 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김종태를 구하라’는 특별지령을 받은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공작선은 68년 8월 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軍警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관학, 송승환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김종태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백두일이라는 가명으로 북한정권 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김질락은 옥중유고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되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쓴 바 있다.



“통혁당은 국제공산당의 일원”


통혁당은 또한 공산혁명조직이었다. 김질락의 앞의 수기 중 65년 11월초 통혁당 결성 당시 김종태의 제안설명 중 일부를 인용해 본다.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反帝·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 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중앙당(中央黨)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 낭독됐던 것으로 같은 수기는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통혁당은 공산혁명을 목표로, 중앙당(中央黨)인 북한 조선로동당의 지휘를 받는 남한 내 지하당(地下黨)이었다.




통혁당의 성격은 68년 공판 당시 언론에도 보도됐다.


김질락은 68년 11월 30일 공판정에서 “反美·反제국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ABC이다. 나는 <청맥>의 지면을 통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의 反美·反괴뢰투쟁을 선동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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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朴聖焌(28세·학생)은 1967년 6월 申榮福에게 포섭되어 처 韓明淑 ... 등을 黨 소조책으로 포섭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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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明淑 前 환경부 장관 남편의 경우



韓明淑 前 환경부 장관의 남편 朴聖焌(박성준)씨는 1968년에 발생한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1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통혁당은 북한의 對南 공작부서가 조직한 남한內 지하黨으로 통혁당 관련자 중 일부는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 발표에 따르면 「朴聖焌(28세·학생)은 1967년 6월 申榮福에게 포섭되어 처 韓明淑 및 박XX, 김XX, 은XX 등을 黨 소조책으로 포섭했다. 朴聖焌은 서울大 상대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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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盧武鉉 정부의 레프트 코드
월간조선 2004년 3월호

** 참조.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810&C_CC=BB








[.... 그는 독학으로 1960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갔고, ‘경제복지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이끌었다.

부인 한 장관과 김근태 민주당 의원 등이 동아리 후배들이다 .....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8&article_id=0000012663§ion_id=110&menu_id=110

박성준씨는

[한겨레 2003-03-24 20:57]









[ 통일혁명당 사건의 법원 판결문의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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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판결문에 적힌 당시의 용어를 그대로 인용했다. 기록은 통혁당 사건을 이렇게 규정했다.


<통일혁명당이 북괴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유격전을 기도하여 무력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과거의 남로당 조직을 부활시킨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지식층의 청년을 포섭하였으며, 잡지 반포, 당소조의 조직, 당원에의 적색사상 교양, 데모 조정, 해안선 답사, 유격전술요원 입북, 간부진의 빈번한 입북과 국가기밀 누설, 거액의 공작금 지원 등이 있은 사실을 감안하여…>


문건의 첫 머리는 통혁당 사건의 주범 김종태(북괴노동당 대남공작원), 김질락(북괴노동당 대남공작원 가명 백두오), 이문규(북괴노동당 대남공작원 가명 백두육), 이관학(괴뢰 군인), 김승환(괴뢰 군인) 등 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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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에 나타난 박성준의 발언이다.



<우리가 現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고 후배들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 合法을 가장해서 동지규합단체를 확대, 現 정부에 대항하고 외세에 항거, 現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민족적, 사회민주적, 사회대중적 사회」라는 구호 밑에 외견상 합법적으로 보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자.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이러한 조직은 민족해방전선(엔,이,엘)이라고 호칭하자.


現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외세의 지배下에 있고, 경제적으로 불평등하여 대단히 모순이 많은 사회다. 자본주의 체제의 악순환을 제거하기 위하여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개혁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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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이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부인 한명숙도 이 사건에 연루돼 1973년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을 받았다.


<피고인 한명숙 등은 북괴는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反국가단체로서, 북괴가 간행하는 표현물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반포하는 행위는 북괴가 시도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은 박성준으로부터 북괴 간행 「청춘의 노래」를 빌려 받고, 박성준의 부탁으로 엥겔스가 쓴 「사회사상총설」 1권을 받아 그 책에 있는 「공산당 선언」을 노트에 필기하고, 박성준의 지시로 이○○, 최○○와 같이 읽고 反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찬양고무하는 표현물을 취득 복사, 보관, 반포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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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은 1979년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처벌받는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1970년대 초반 한국 사회구조의 병폐를 없애기 위해 강원룡 목사가 만든 단체이다. 한명숙은 당시 여성 교육을 담당하는 여성부분 간사로 일했다.
한명숙은 이XX, 장XX, 황XX, 신XX, 김XX과 만나 모스크바방송·북경방송·평양방송·통혁당목소리방송 등을 들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써클회원 6명이 모인 자리에서 회의를 속개하기에 앞서 그 집에 있던 라디오를 조작하여 「어버이 수령 김일성…」하는 북괴의 어린이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괴방송을 함께 들은 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스웨덴의 탁아소 등 어린이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잘 되어 있는 곳은 이북이라고 하더라」는 요지의 말을 하여 反국가단체인 북괴 또는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에 동조 또는 찬양하여 이를 이롭게 했다>


판결문은 한명숙의 여성사회에 관한 활동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피고인 한명숙은 다른 피고인들에게 「여성문제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니 읽어 보라」면서 「조선여성독본」 복사판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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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810&C_CC=BB


통혁당 판결문의 총리 부부 행적 추적


『「어버이 수령 김일성…」 하는 북괴의 어린이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괴방송을 들었다』(한명숙 판결문)
월간조선


『現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외세의 지배下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악순환을 제거하기 위해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개혁해야 한다』(박성준 판결문)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이 기사는 월간조선 2006년 5월호에 실려있습니다.)


37년 만에 공개된 통일혁명당의 전모



37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통일혁명당 사건의 법원 판결문은 당시의 사건 규모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A4 용지 1000여 쪽에 달하는 판결문은 통혁당 사건이 한국전쟁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사건으로 158명이 검거됐고, 73명이 검찰에 송치됐으며, 30명이 중형을 받았고, 주모자 5명은 사형당했다.


피고인 명단에는 이른바 「진보지식인」이라 불리는 인사들이 적잖게 포함돼 있다. 한명숙(한명숙) 총리지명자의 남편 박성준(박성준) 성공회大 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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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 ...... ]




“통혁당은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는 전위조직”

(公安사건 분석) 통혁당(2)


金成昱




중앙당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았던 지하당 통혁당은 공산(共産)혁명조직이었다. 김질락의 수기 ‘주암산’ 中 65년 11월초 통혁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김종태의 제안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반제(反帝)·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중앙당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 낭독됐다.



통혁당의 이 같은 성격은 68년 공판당시 언론에도 일부 보도됐다.

김질락은 68년 11월 30일 공판정에서 “반미·反제국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ABC이다. 나는 <청맥>의 지면을 통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의 반미·反괴뢰투쟁을 선동하였다”고 말했다.



김질락은 그러나 68년 12월18일 공판정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큰가를 뉘우칠 뿐이며 정당함을 주장할 것이 없다”고 변호인신문을 거부한 뒤“그 동안 공산주의를 위해 싸워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으며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후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질락의 이 같은 반성은 다른 주범들과 달리 북한으로부터 영웅칭호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통혁당 잔존세력, 주체사상 받아들여 당 재건 기도>



통혁당은 68년 조직원 대부분이 검거됐지만, 북한과 연계된 잔존세력은 이후에도 지하당 활동을 계속했다.


통혁당 잔존세력의 당 재건은 69~79년간 9차례나 검거됐다. 69년 9월 경남 통혁당 재건 사건·69년 10월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71년 5월 호남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71년 통혁당 조직 사회혼란사건·71년 통혁당 재건 3개망 간첩사건·72년 지하 통혁당 조직 거물간첩사건·75년 학원간첩 침투사건·79년 삼척 고첩단 사건 등이 그것이다. 당시 공안당국은 이 사건들을 북한과 연계한 잔존세력의 통혁당 재건 사건으로 규정했다.



69년 이후 등장한 통혁당 재건 조직들은 김일성주의 내지 주체사상(主體思想)을 내걸기 시작했다. 69년 발표된 통혁당 선언·강령 역시 소위 “김일성 원수의 위대한 혁명사상,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선언은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맑스-레닌주의를 현시대와 우리 조국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은 40여 년간의 험난한 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완벽함을 과시한 우리 시대의 맑스-레닌주의이다”고 주장했다.


선언은 또 “우리 당은 바로 이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고 있기에 불패이다. 우리 당의 최고목적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인류의 세기적 숙명이며 최고 이상이다”며 “미군침략군을 격퇴하고 괴뢰정권을 타도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인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69년 이후 북한과 남한 내 운동권이 묘사하는 68년 통혁당 조직 역시 철저한 김일성주의 조직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대남선전매체 ‘반제민전’인터넷홈페이지에 올라있는 ‘한국전위조직운동사’는 “1968년 통혁당 김종태, 이문규 등 지도핵심들은 <김일성 선집><김일성 전기>와 평양방송의 방송강좌 등을 이용하여 지도사상을 교양학습하고 지도사상을 조직원 및 대중에게 선전, 유포하면서 생활의 전반에 걸쳐 실제투쟁과 조직생활을 통해 핵심으로의 단련을 거듭해 갔다”고 적고 있다.



서울시 은평구 대조동에 소재한 도서출판 ‘대동’의 89년 출간서적 ‘통혁당’은 68년 김종태의 통혁당에 대해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남조선의 혁명적 당”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은 통혁당이 67년 발간한 비합법기관지 <혁명전선>을 싣고 있는데 이 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964년 3월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김질락, 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다.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되었다. 金鍾泰 동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써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임시투쟁 강령과 행동목표에 대한 심의에 들어갔다.


<<통일혁명당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 동지의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는 한국근로민중의 전위조직이다>>...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김종태 동지의 제안에 신영복 동지가 우선 찬동하였다.

<<조국통일과 한국혁명이라는 우리 당의 과제도 함축되어 있고 통일혁명당이라는 우리 당의 이름도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원이 찬성하였다...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김일성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이 눈의 잠시 뜨겁게 빛났다. 흥분하여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김종태 동지가 입을 열었다.


<<동지들, 기관지 창간으로 우리들도 바야흐로 진리의 불모지인 이 한국 땅에 영생불멸의 김일성주의 사상이론을 정력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통혁당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남을 하나의 거대한 사건입니다.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수단으로 보다 많은 김일성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평양에 金鍾泰 거리, 北 통혁당 연루자들 영웅화>



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밀입북해 지령을 받았던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을 당했다. 신영복, 이재학, 오병철, 신광현, 정종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김종태의 아내 임영숙은 1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英雄)화에 나섰다. 69년 1월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는 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을 받은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69년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69년 11월6일 이문규가 사형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김질락은 북한정권에게 변절(變節)을 이유로 외면당했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를 받아 출감했다. 그는 89년 이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1년 인터뷰기사, “사회주의서적 번역 옥살이”>



한명숙씨가 노무현 정권 당시 국무총리에 지명된 후 남편 박성준씨의 사상편력이 화제가 되자, 朴씨는 과거 통혁당 가입사실을 부인해왔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2006년 4월3일 동아)”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오마이뉴스)”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申榮福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조선)”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2006년 3월25일 문화)”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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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은 黨 소조 조직책>



당시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 수사발표에 따르면, 박성준씨(당시 서울대경제학과 4년. 25세)는 1967년 6월 신영복에게 포섭된 ‘당 소조책(小組責)’으로서 아내 한명숙 및 朴OO, 金OO 등을 소조(小組)로 포섭했다. 그는 “서울 상대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고 한다.



공안전문가 A씨는 黨소조책(小組責)과 소조(小組)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입당한 당원 중 최소 조직을 세포(細胞)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당원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소조를 이룬다. 소조와 세포는 지하당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지하당의 소조와 세포,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간부인 黨 소조책(小組責)이었다는 것은 당연히 지하당에 입당한 당원(黨員)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박성준씨를 서클 회원들을 소조와 같은 ‘통혁당 당원’으로 포섭 또는 포섭을 시도한 黨 소조책(小組責)으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재판에서 박성준씨가 포섭 또는 포섭을 시도했다는 朴OO씨는 2심에서 3년 형을, 金OO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한명숙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 박성준씨 판결문 中>



당시 검찰은 박성준씨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검찰 공소장에는 ‘박성준이 사회주의·공산주의·유물론 등 사회과학 서적은 물론 북한이 발행한 불온서적도 열심히 학습했다’고 적시되어 있다. 朴聖焌씨는 이 같은 책을 읽은 후 주변 인물에게 사상을 전파한 걸로 돼 있다. 그가 공부했던 책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 자본론’, ‘사회사상전집’, ‘불란서 유물론’, ‘레닌의 성과적 유물론’,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청년의 노래’(北傀 발행),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 ‘공상에서 과학으로’,‘ 새벽길’(北傀 발행)>




판결문에 나타난 朴聖焌씨의 발언이다.


<우리가 現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고 후배들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 합법을 가장해 동지규합단체를 확대, 現 정부에 대항하고 외세에 항거, 現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민족적, 사회민주적, 사회대중적 사회’라는 구호 밑에 외견상 합법적으로 보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자.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이러한 조직은 민족해방전선(엔,이,엘)이라고 호칭하자. 現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외세의 지배 하에 있고, 경제적으로 불평등하여 대단히 모순이 많은 사회다. 자본주의 체제의 악순환을 제거하기 위하여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개혁하여야 한다>



1심 판결에 불복한 박성준씨는 항소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민족해방전선’을 구성한 바 없으며, 4·19 묘지에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사실도 없고, 그 밖에 이 사건 책자를 구입하거나 빌려 보거나, 빌려 주고, 필기시키고 한 모든 행위가 북괴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며, 신영복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경솔한 소행을 하기에 이른 것이니 기독교인으로서 깊이 반성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박성준씨의 항소이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심을 확정했다.




한편 한명숙씨의 통혁당 사건과 관련 판결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피고인 한명숙 등은 북괴는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反국가단체로서, 북괴가 간행하는 표현물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반포하는 행위는 북괴가 시도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은 박성준으로부터 북괴 간행 ‘청춘의 노래’를 빌려 받고, 박성준의 부탁으로 엥겔스가 쓴 ‘사회사상총설’ 1권을 받아 그 책에 있는 ‘공산당 선언’을 노트에 필기하고, 박성준의 지시로 이○○, 최○○와 같이 읽고 反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찬양고무하는 표현물을 취득 복사, 보관, 반포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



한명숙씨는 1979년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처벌받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1970년대 초반 한국 사회구조의 병폐를 없애기 위해 강원룡 목사가 만든 단체이다. 韓明淑씨는 당시 여성 교육을 담당하는 여성부분 간사로 일했다.


한명숙씨는 이XX, 장XX, 황XX, 신XX, 김XX과 만나 모스크바방송·북경방송·평양방송·통혁당 목소리 방송 등을 들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써클회원 6명이 모인 자리에서 회
작성일:2017-04-17 03:53:43 211.169.1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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