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 ‘암자기행’

늦가을 여정으로 절집과 암자를 권하는 건, 거기서 ‘텅 비어 있음’의 시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모든 것들이 다 저무는 계절. 해남 땅에서 적요한 절집과 암자를 찾아간다. 해남이라면 누구나 대번에 떠올리는 절집이 대흥사다. 대흥사가 두륜산에 거느리고 있는 산내 암자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아는 이들만 안다. 백화암, 청신암, 관음암, 진불암, 상관암, 일지암, 북미륵암, 남암…. 이 중에서 가장 오래 발길을 붙잡는 곳이 만일암 터다.

두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가련봉 아래 자리잡았던 만일암은 한때 두륜산 불법의 중심이었다. 지금은 다 허물어져 빈터로 남아있지만 큰절 대흥사의 시작도 바로 이 암자였다.

암자 자리에는 본래는 7층이었으나 지금은 5층만 남아 있는 석탑이 대숲을 두르고 서 있다. 날렵하고 훤칠하게 솟은 석탑은 가련봉 암봉을 지붕으로 삼았다. 석탑 아래쪽에는 마른 가지로 활개를 치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천년수’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 나이는 1000년에다 200년쯤을 더했다.

북미륵암은 국보로 지정된 용화전 안 마애여래좌상이 압권이다. 단단한 화강석을 마치 무른 비누처럼 깎아낸 솜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도무지 1000년 전에 깎은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만일암·북미륵암·부도암·도솔암 등 쉬어만 가도 마음의 때 씻겨

미황사는 대흥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대흥사가 시간의 깊이로 육중한 느낌이라면, 미황사에서는 단청이 지워진 대웅전의 모습처럼 수수하고 단정한 기운이 느껴진다. 본디 미황사는 좀 헐거운 느낌이었으나 중창 불사가 계속되면서 절집 안에 건물이 빼곡해졌다. 다행인 건 새로 들인 건물도 뽐내지 않고 반듯해 절집의 옛 정취를 흩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황사가 품고 있는 암자는 부도암 단 하나다. 부도암은 이름 그대로 부도밭을 거느린 암자다. 부도는 놓아둔 그대로 조형예술품이다.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고승들의 부도탑에는 게와 물고기, 거북이 조각이 새겨져 있다. 위엄 있는 조각 대신 슬며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것들이다.

미황사가 기대고 있는 달마산에는 우리 땅의 암자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자리에 세워진 도솔암이 있다. 도솔암으로 드는 산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왼쪽으로는 진도 앞바다를, 오른쪽으로는 완도의 바다를 끼고 걷는 이 길은 마치 하늘을 딛고 걷는 듯하다.

두륜산이 바다 쪽으로 흘러내리다 다시 우뚝 일어선 위봉산의 거친 암봉 아래 성도사가 있다. 거친 바위 아래 완도 앞바다를 너른 마당으로 삼고 있는 자리가 워낙 빼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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