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매 칼럼> 개발에 밀린 농토, 먹거리는 어디서 키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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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 칼럼> 개발에 밀린 농토, 먹거리는 어디서 키우나
  •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 승인 2019.01.01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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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은 매해 가을 울산 서생에서 배와 배즙을 보내줬다. 누이가 보내온 서생배는 유난히 달고 즙이 많았다. 누이의 이웃은 큰 배밭을 한다고 했다. 일손이 부족할 때면 누이는 밭일을 거들어 주고 적지 않은 배와 배즙을 챙겼다. 원채 너른 밭이라 상품의 배를 다 따고도 발부리에는 낙과한 하품의 배들이 지천이라고 했다. 때로 배는 보기 좋은 상품보다 못생긴 하품이 더 맛났다. 그런 배로 짠 배즙도 꿀맛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뜻하게 데운 배즙은 기관지에 좋아 겨울철 목이 따끔해 올 때면 특효약이 됐다. 누이는 결혼한 첫해, 산봉우리 전체가 하얀 배꽃으로 뒤덮혔던 봄날의 그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어느 날부터 울산에서 더는 배와 배즙이 오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배즙도 마침내 바닥을 드러냈다. 지난달 가족 모임에서 만난 동생에게 요즘은 왜 배를 안 보내느냐고 슬며시 물어봤다. 동생은 정색을 했다. “오빠, 이젠 울산에도 배가 귀해. 우리도 먹기 어려워.”

이화에 월백했던 그 산봉우리는 대규모 개발붐이 불더니 몇해 전 전원주택 단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땅을 판 배밭 주인은 큰돈을 받아 시내에 빌딩을 샀단다. 더는 배농사를 지을 땅도 없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농사를 지을 생각은 없을 거라고 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자료를 찾아보니 울산의 배 재배면적은 2008년 1027㏊에서 올해 361㏊로 무려 64.8%나 줄어들었다. 흔해 빠졌던 배가 안 보일만도 했다.

어디 서생배만 그럴까. 전국적으로 곡물과 과수 재배량이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농업인이 줄고, 도시화로 논밭이 줄어든 탓이다.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 갯벌도 사라지고 있다. 짱둥어, 꼬막, 백합, 피조개 같은 수산생물들이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사라진 논밭과 갯벌 위로 도로가 건설되고, 아파트가 지어지고, 공장이 들어선다. 생산하고, 거주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지만 가끔씩은 의문이 든다. 이런 속도로 사라진다면 남아날 것이 있겠느냐고. 

잠시 주춤하던 사회간접자본(SOC) 등 건설주택 투자가 2019년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상당부분 되살아났다. 모든 공공시설을 민자사업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GTX-A사업 등 광역권·교통 물류기반을 조기에 추진하기로 했다. 500억원부터 실시하던 SOC 예타사업 대상기준이 1000억원으로 올라갔다. 세종-안성고속도로 등 공기업과 지자체가 추진 중인 토목건설사업은 앞당기기로 했다. 경기 과천·남양주·하남, 인천 계양 등에는 3기 신도시 건설계획도 발표됐다. 정부는 ‘경제활력’을 되찾기 위해 이같은 사업을 추진한다고 했다. 벌써부터 어질하다. 또 얼마나 많은 농지와 임야가 사라질 것인가를 생각하면.

역대정부는 경기가 부진할 때마다 토목건설 카드를 꺼내들었다. 곶감 빼먹듯이 알토란같은 땅을 쓰면서 이 땅은 만신창이가 됐다. 국토의 뼈대라는 백두대간도 가로세로로 잘려 제 모습을 잃은 지 오래다. 우리 세대가 끝나고 나면 제대로 쓸 만한 땅뙈기가 남아 있기나 할 것인지 모르겠다. 

토목건설 투자를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선택과 집중을 하자는 거다. 여기저기를 새로 뒤엎기보다 기개발된 곳을 고쳐 쓰는 방식으로 투자전략을 바꿔야 한다. 예를 들어 도심용적률을 과감하게 높여 초고밀도로 재개발하고 노후한 SOC의 개보수에 적극 투자하는 방식이 있다. 30년이 다 돼가는 1기 신도시만 해도 손대야 할 SOC가 한두 곳이 아니다. 

다음 세대에 이 땅을 잘 물려주는 것도 우리 세대의 책무다. 우리 아이들도 청송 사과 맛을, 천안 복숭아 맛을, 정안 밤 맛을, 벌교 꼬막 맛을 볼 권리가 있다. 신안 갯벌낙지 맛이, 제천 올갱이국 맛이, 섬진강 재첩국 맛이 기가 막혔다는 것을 교과서를 통해서만 배우게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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