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본말전도(本末顚倒)라는 말이 있다. 일의 본질적인 면이나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뜻이다. 이 말이 정부의 적정임금제 시범사업에도 적용돼야 할 것 같다. 적정임금제 시범사업에 앞서 적정공사비 시범사업부터 하는 편이 좋겠다는 얘기다.

적정임금제는 공사계약에 시중노임단가 이상의 임금을 지급토록 하자는 것이다. 국토교통부는 2017년 ‘건설산업 일자리 개선대책’ 중 하나로 적정임금제 시범사업을 제시했다. 이에 국토부 산하 한국토지주택공사, 한국도로공사는 지난해부터,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올 7월부터 시범사업을 해오고 있다. 지자체 중에서는 서울시를 시작으로 경기도가 지난 1월부터 모든 공사계약에 이를 적용하고 있다.

취지는 좋다. 소득주도 성장을 위해 건설현장 근로자의 임금수준을 높이고 보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정부 정책에 공공기관과 지자체가 억지로 떼밀려 시늉만 내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현장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오히려 일한 만큼 제값을 받는 적정공사비가 정착이 되면 적정임금은 자동적으로 안착이 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래서 시범사업도 적정임금 시범사업보다는 적정공사비 시범사업을 먼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현실만 봐도 그렇다. 우선 입찰금액 낙찰제도가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다. 낙찰하한율에 또 낙찰률이 더해져 낮춰질 대로 낮춰진 하도급 공사금액에서 모든 근로자에게 시중노임단가 이상으로 노임을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무리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공사비가 아무리 증액이 돼도 하도급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가 많다. 공종 특성상 시중노임보다 월등히 높은 노임을 지급하는 현장인데도 불구하고 발주기관은 시범사업이랍시고 흉내만 내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정작 인력이 모자라는 현장 업체들로서는 시범사업에 따른 서류작업 등 행정적 일감과 지시사항만 늘었다는 불만도 제기되고 있다.

표준근로계약서를 둘러싼 갈등도 문제이다. 업체들은 포괄역산 방식으로 주휴수당을 일당에 포함해 지급하고 있는 반면 발주기관의 계약서 양식은 기본급여와 주휴수당 등 법정비용을 분리해 지급토록 하고 있다. 가령 일당 20만원을 주는데, 공사설계에 반영도 안 된 법정수당을 별도로 더 주라는 요구다.

올해 말까지 시범사업이 완료되면 내년부터 건설근로자법 등의 개정을 통해 적정임금제를 본격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시점에서 적정임금제 시범사업의 실효성에 대한 중간 점검이 필요하다. 또한 하도급계약 금액 심사 기준도 원도급 낙찰률 증가와 연동해 상향 조정됐는지, 노무비 반영비율도 함께 높아졌는지 등을 철저하게 따져봐야 할 일이다.

단순히 정부 정책에 따라 생색만 내고 실제로는 시공업체에 비용과 행정력을 전가하도록 한다면 이 역시 갑질 중에 ‘상갑질’이 되는 것이다. 갑질을 막고 근로자의 적정임금을 보장하자고 하는 일이 또 다른 갑질이 돼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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