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야 어찌 됐건 한국과 일본의 경제전쟁은 시작됐다. 통상 경제적인 분쟁에서 사용되는 카드는 수입 규제이며 미·중 무역분쟁이 대표적인 예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행태에 대해 마음이 들지 않을 경우 그 국가로부터 들여오는 수입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양을 제한하기 위해 관세를 높이는 것이 관세장벽을 동원한 보호무역주의적 수입 규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본의 한국에 대한 규제는 수입 규제가 아니라 수출 규제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출되는 품목에 대한 규제를 의미한다. 보통 수출을 많이 하면 부가가치가 증가하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는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 즉 제 살을 깎아 먹는 이율배반적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안행형(雁行型, Flying Geese Model) 경제발전 모델이다. 일본의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은 이 모델에 기반한다.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맨 앞에서 리더 기러기(일본)가 나머지 기러기들을 끌고 나간다. 일본의 산업 고도화 전략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산업을 한국, 중국, 동남아 지역 등으로 이전하고 일본은 그 국가들에게 소재·부품을 파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국가들의 생산이 증가할수록 일본의 부가가치도 커지게 된다. 좋은 말로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국가 간 ‘시너지 상생’이지만, 고개를 꺾어 생각해 보면 다른 나라들의 산업 활동이 활발할수록 일본경제가 좋아지는 ‘착취 구조’인 것이다. 바로 이 안행형 구조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대부분은 모르는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와 교역하는 261개국과의 무역수지를 보면 일본은 우리의 최대 무역적자국이다. 그 무역적자 규모는 최근 10여 년 동안(2008~2018년) 연평균 267억 달러, 원화로 약 30조원에 이르고 있다. 이 무역역조 원인의 상당 부분은 한국의 대(對)일본 수입 구조의 특징 때문이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대부분의 품목은 소재, 부품 등이 포함된 중간재와 기계 및 장비 등의 자본재이다. 중간재와 자본재를 합해 산업재라 이르는 데 우리나라의 대(對)일본 수입 중 산업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기준으로 81.4%에 달하고 있으며, 우리 전체 산업재 수입에서 일본산 산업재 수입 비중은 14.6%에 달하고 있다.

이렇게 높은 산업재 의존도는 만약 일본이 우리에게 해코지하려 마음을 먹는다면 일본에게 좋은 칼자루가 될 수도 있다. 한국 경제 전체적으로는 일본산 산업재의 비중(일본산 산업재/전체 산업재)은 3% 내외 정도로 작은 편이지만, 어떤 품목은 수입이 차단되면 산업 자체의 생산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그것을 노리고 일본이 먼저 수출 규제를 통한 선제공격을 취한 품목이 바로 우리 반도체 생산에 필수요소인 고순도불화수소(에칭가스), 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의 3개 품목이다. 그리고 최근 후속 조치로 한국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하고 약 1100여 개의 품목에 대한 한국으로의 수출을 제한하는 정책도 시행 중이다. 

울분이 터지지만, 누구를 탓할 수는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전문가들이 핵심 소재·부품의 국산화가 시급하다는 경고를 했었다. 그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우리 정부와 산업계의 잘못인 것이다. 산업별로는 생산과정에서 중간재 및 자본재의 일본산 의존도(일본 산업재/전체 산업재)가 높은 철강(2014년 기준 6.4%), 화학(6.0%), IT(4.9%) 등이 취약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건설업의 경우에도 비제조업 중 가장 높은 5.5%의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빠르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중요한 소재·부품과 기계·장비의 국산화율이 높아지면서 일본산 제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과거 한·중 간의 사드사태나 최근 한·일 간의 수출 규제 문제에서 얻는 교훈은 명확하다. 산업의 경쟁력이 취약할 경우 작은 외부 충격이 우리 경제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과 같이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동북아 정치 지형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국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한 경제력은 생존의 필수 요소다.

이를 위해서 정부는 산업경쟁력을 국가전략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명확하고 구체적인 경제·산업 정책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최근 보호무역주의의 타깃이 기술로 전환되는 추세에 대응해 핵심 하이테크 소재·부품 및 장비 국산화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특히, 이러한 산업재 생산은 대부분 중소기업의 영역이기 때문에, 수요자인 대기업과 공급자인 중소기업이 상호 성장할 수 있는 건전한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한편, 기업들은 그동안 쉽고 편한 길을 찾으려만 했던 자세를 반성하고 혁신을 통해 기업의 근본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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