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이 높은 대기업들에 대해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을 면제해주던 제도가 폐지된다. 또 발주자와 원·하도급 업체 간의 직불 합의도 ‘계약일로부터 30일 이내에 한 경우’에만 지급보증이 면제되도록 법에 명시됐다. 정부는 지난달 31일 국무회의에서 이같은 내용의 하도급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만시지탄이나 공정거래위원회의 노력이 관철돼 다행이다.  

그동안 신용평가등급이 일정수준(회사채 A0, 기업어음 A2+) 이상인 건설사에게는 하도대 지급보증을 면제해줬다. 그런데 이런 제도가 왜 생겼는지, 왜 필요한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대기업들에게 장착해준 ‘갑질용 무기’ 혹은 ‘특혜’라면 오히려 쉽게 이해가 된다. 

원·하도급 건설계약에서 상호보증 즉, 공사이행보증과 대금지급보증은 신뢰 담보의 핵심이다. 그런데 신용등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지급보증을 면해준 것이다. 균형을 잃은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지급보증 면제 자체가 대기업들에게는 든든한 ‘빽’이자 ‘면죄부’였다. 수직적 갑을관계에서 기본적으로 불리한 을의 위치인 하도급사들은 대항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금지급보증이 안 되니 대기업들의 갑질이나 불공정행위에도 하소연 한번 제대로 못하고 무방비로 노출됐다.

이들 대기업들이 포함된 종합건설업계에서는 지난 10년간 면제대상 우량 건설사의 부도가 단 한 건도 없었다면서 ‘정부의 이번 조치는 아무런 실익 없이 업계 부담만 가중시키는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바둑에는 대마불사가 있을지 몰라도 기업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적지 않은 중견·대기업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2011년 회사채 평가등급 A- 회사도 갑자기 CCC로 급락, 워크아웃 개시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급보증 면제 대상 27개 대기업들도 2016년~2018년 사이 7건의 법위반과 187건(조정금액 586억6000만원)의 분쟁조정 사례가 있다.

더욱이 세계는 점점 더 불확실성의 시대로 가고 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1997년 IMF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예고 없이 찾아왔다. 특히 작금의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보라. 마치 우주인 침공이라도 당한 듯 전 지구가 혼란에 빠졌다. 우리 경제·산업에도 거대한 쓰나미가 우려되고 있다. 그럴 경우 대기업들도 갑자기 쓰러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건설에서 한 대형업체가 부도나면 수조원의 피해가 나면서 그에 딸린 수백, 수천 개의 하도급업체들이 줄도산할 수 있다. 이런 리스크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번 법개정은 그런 차원의 당연한 조치이다.

기업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대기업들의 고충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량기업이 달리 우량기업인가. 기본으로 돌아가고 모범을 보이는 게 우량기업의 자세이다. 편법이나 특혜는 걷어 버리고 먼저 솔선수범하는 것이 일류기업의 품격이다. 이번 법 개정에도 일류기업들이 그런 역할을 해달라는 공정위의 바람이 담겨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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