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당 최남주에 의해 1934년 10월31일 경주 남산 식혜골에서 발견된 신라남산신성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석당 최남주에 의해 1934년 10월31일 경주 남산 식혜골에서 발견된 신라남산신성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석당 최남주는 보성학교 시절 은사이자 민족사학자인 황의돈 박사의 권유로 1926년 경주박물관의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에 들어가 신라문화유산 보호와 연구에 전념했다.

황의돈 박사는 석당에게 일제 치하에서 꼭 총칼로 일본에 무력 항쟁하는 것만이 독립운동의 길이 아니라, 고향 경주에서 신라문화유산들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도 정신적 항일투쟁이란 사실을 강조했다.

석당은 평생동안 수많은 신라 문화재를 발견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잊지 못할 문화재는 일제 강점기에 발견한 ‘남산신성비’였다. 

1934년 10월31일 늦가을의 해가 선도산 너머에 걸릴 무렵 석당은 경주 남산 기슭 식혜골 사제사지 답사를 마치고 헌강왕릉 수호인 김헌용씨 고택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평소 신라 금석문 발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석당은 김헌용 씨에게 혹시 부근에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마침 자신의 집 돌다리에 옛날 문자가 쓰여진 비석 같은 것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에 석당이 즉시 돌다리를 뒤집어 보니 첫 행에 ‘신해년’이란 글자를 판독할 수 있었다. 이 비석이 바로 신라고대사 연구에 획기적인 사료인 ‘남산신성비’였다.

비석은 높이 88cm, 넓이 42cm, 두께 9~12cm의 달걀형 자연석에 각 행 20자씩 9행으로 육조풍과 혼합된 신라 고유의 고졸한 서체로 문장이 구성돼 있었다.

첫머리에는 “신해년 2월26일 남산신성”이란 글씨가 기록돼 있었다. 신해년은 ‘삼국사기’에 남산성을 축성한 해로 기록돼 있는 진평왕 13년(서기 591년)과 일치했다.

‘남산신성비’ 비문의 하이라이트는 축성공사를 담당한 신라 전문건설인들이 본인들의 이름을 새기고 자신들이 맡은 공구가 완공 후 3년 이내 무너지면 그 죄를 달게 받겠다고 맹세한 내용이다.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뭉쳐진 신라 전문건설인들의 아름다운 마음가짐이다.

석당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남산신성비’는 당시 동양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도 “이 비석은 어느 석탑, 석불, 고건축물만큼이나 신라 고대사 연구에 큰 보물”이라 했다. 신라 전문건설인들의 책임감과 사명감은 삼국통일 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국제적 도시로 건설하는데 중요한 자원이 됐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통일신라 전성기 서라벌의 도시 규모는 주택 17만8936호에 1360방, 주위가 55리, 인구가 100만명 규모였다. 이는 당시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 대당제국의 수도 장안에 이어 세계 4대 도시 규모의 메가시티였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국제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전문토목건설 집단과 전문건축인 집단이 신라에 존재했고, 정부 차원에서 그들을 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경주 황룡사 남쪽 광장을 발굴해본 결과 길이 500m, 너비 50m의 대형광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광화문 광장(600m×60m)과 맞먹는 규모이다. 이번 신라왕경주유적 발굴에서 신라 전문건설인들의 뛰어난 토목 기술력과 성실한 시공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1500년 전 ‘신라남산신성비’의 기록처럼 오늘날의 대한민국 전문건설인들도 국가의 합리적인 지원과 보호를 바탕으로, 책임감과 사명감을 이어받아 21세기 전 세계 건설계의 총아가 되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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