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를 챙겨 주는 작업에는 ‘짓다’라는 동사가 호출된다. 영양분을 공급하여 육체를 살게 하는 일은 ‘밥 짓기’가 맡는다. 외부로부터의 무단한 침입을 막아 육체를 보전하는 일은 ‘집 짓기’가 책임진다. 체온을 유지하고, 부드러운 살갗을 유지하게 돕는 일은 ‘옷 짓기’의 몫이다.

의식주에 대한 원초적 걱정이 사라진 지금에는 그 ‘짓기’에 대한 경외가 줄긴 했다. 하지만 ‘짓기’ 없이는 존재 보전 자체가 어려운 만큼 ‘짓기’를 소중히 여기는 흔적들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셰프가 인기 직종이 되고, 건축가가 존경받고, 디자이너가 셀레브리티 반열에 들어서는 것도 그런 탓이 아닌가 한다.

인간 존재와 ‘짓기’의 관계는 육체적인 면으로만 그치진 않는다. 인간 각 개체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이름도 ‘짓기’의 작업을 초청해 낸다. ‘그대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듯’ 이름 짓기로 존재는 확인되고 개성을 유지하게 된다.

이름 짓기는 존재 보전을 넘어 유일한 존재로 태어나게 하는 위대한 생산 작업이다. 귀한 자녀들의 이름 짓기를 허투루 하는 이는 없는 것도 그런 이유다. 지어준 이름을 따라 이름값을 하는 존재로 완성되라는 명령이 되는 셈이니 누가 이름 짓기를 손쉬워 할까. 그래서 존경하는 이에게 이름 짓기를 칭하고 그 이름으로 존재를 확인하는 예식을 치른다.

그러고 보면 ‘짓기’는 인간 존재의 생명을 책임지고, 개성까지 챙기는 작업이니만큼 엄숙한 일이었다. 멀리 시간을 거슬러 가면 모든 ‘짓기’에는 예식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상량식을 하고, 지은 옷 발표회를 하고, 지은 음식을 나누며 평가하는 일을 해왔다. 그만큼 인간사에 소중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짓는 일로부터 중요성의 무게가 점차 빠져 나가고 있다. 짓는 일의 존엄성 살은 뼈다귀에 살짝 걸쳤다 할 정도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선 누구든 제 손으로 더 이상 짓기를 하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대신한 ‘짓기’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대량의 ‘짓기’가 이뤄지고 보편화된다.

대량 짓기는 ‘찍기’ ‘찍어내기’에 가깝다. 모두 같은 모양으로 찍어낸 것을 먹고, 입고, 또 살아낸다. 그래서 밥 짓고, 집 짓고, 옷 짓고 하는 일은 남의 일이 되고 그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하는 일은 좀체 없어져 버린다. 얼마 가지 않아 ‘짓기’라는 단어의 실종으로까지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인간 존재로부터 크게 도망하지 않고 주변에 남은 ‘짓기’ 작업은 이름 짓기가 아닐까 싶다. 아직도 이름은 존재의 집으로 인정받는 덕인지 찍어 남발되고 있진 않다. 아이들에게 전에 없던 새로운 이름들도 부여돼 주변을 환하게 하는 일도 종종 있다.

그래서 이름 짓기는 ‘짓기’를 계속하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인간 존재와 관련된 이름 짓기 작업의 바깥으로 가면 이름 짓기도 어김없이 이름 ‘찍기’로 변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의미 없이 찍어낸 아파트 이름들, 각 호수에 부여된 몇 동 몇 호라는 번호들. 이름 ‘찍기’가 된 주거는 그래서 개성은커녕 식별조차 힘들다. 찍어낸 건물에 사는 것이 못마땅해서 몰개성을 물리치자고 시작한 이름 짓기였을 것이다. 짓지 않고 찍었으니 그 의도를 살릴 리 만무하다.

동네에 어울리는 아파트 이름을 짓고, 집집마다 동, 호수 뒤에 집 이름을 하나씩 가지면 어떨까 하는 희망을 떠올려본 적이 있었다. ‘명랑아파트 웃음동 살구나무집’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식구들이 자신들의 삶 정체성도 한번 돌아보는 그런 기회를 가졌으면 했다. 존재를 확인하며 사는 일이 소중함을 그런 식으로라도 경험해 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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