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분수대 옆으로 전차 다니던 시절     

57년 전 문연 동양서림 터줏대감

물려받은 소년점원이 현재 사장

고가도로 철거 후 문화공간 숨통




오래된 동네에는 주민들이 애착을 느껴 사랑하는 명소가 있기 마련이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혜화동로터리’ 가 바로 그런 곳이다. 1960년대 원형화단 중앙의 분수대가 여름이면 시원한 물줄기를 뿜고, 그 옆으로 전차가 돈암동과 을지로를 오가던 혜화동로터리.

보성, 동성, 경신중고, 혜화여고, 등 인근의 중·고교가 순번을 정해 꽃나무와 잔디에 물을 주고 가꿀 정도로 사랑받던 곳이다. 이처럼 동네를 상징하던 혜화동로터리는 세월과 함께 숱한 변화를 겪어야했다.



1947년 7월19일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곳에서 암살당했으며, 혜화동 성당은 5·16군사쿠데타 직후 장 면 국무총리가 장기간 은신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동성중고 맞은편 우리은행 혜화지점은 1982년 상업은행 시절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으로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렸다. 1971년 4월 삼선동 쪽으로 고가도로(폭9m, 길이340m)가 가설되면서 로터리일대는 삭막해졌다.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자 서울시는 2008년 8월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신호등을 이용한 평면교차로를 만들었다.

지역주민들은 대학로가 시작되는 이곳을 문화가 숨 쉬는 공간으로 만들자며 ‘혜화동로터리’ 시비까지 만들어 세웠다. 혜화동로터리의 터줏대감은 57년간 같은 장소에서 영업 중인 동양서림(대표 최주보.73)이다. 이 책방은 1980년대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등 대형서점의 등장과 인터넷서점의 영향으로 어려운 고비가 많았으나 꿋꿋하게 노포(老鋪)의 명맥을 잇고 있다. 간판도 형광등이나 LED가 아닌 조그만 등 몇 개가 동양서림이란 네 글자를 비추고 있는 고전적인 형태이다.

간판 밑의 <Since 1954>가 전통을 말해주는 동양서림은 1954년 고 장욱진 화백(1918~1990)의 부인이자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장녀인 이순경 여사(91)가 개업했다. 당시에는 양갓집 규수가 장사를 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으나 이 여사는 용기를 내어 문을 연 뒤 26년간 오도카니 서점을 지키다 1980년 3월 현재의 사장인 최 씨에게 돈 한 푼 안 받고 책방을 물려줬다.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를 중퇴했던 최 씨는 친척의 소개로 동양서림에 취직했다. 최 씨는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살면서 덕수상고 야간부를 거쳐 성균관대학을 졸업했다. 이러한 최 씨의 성실성과 근면함을 평소 눈여겨 보아온 이 여사가 책방을 맡겨버린 것이다.

이 여사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여생을 남편의 예술세계와 함께 하고 있다. 재단 내에 ‘집운헌’이란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 장 화백의 셋째딸 장혜수씨(59)는 “혜화동로타리와 동양서림은 어머님뿐 아니라 우리 형제들의 고향 같은 곳으로 추억과 애환이 서린 곳” 이라며 “동양서림의 최 사장님은 은혜를 잊지 않고 명절 때마다 어머님을 찾아뵙는다.”고 말했다.   /설희관<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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