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길에 빚더미 지난해 11월 해체선언
구명캠페인·모금운동·정부지원도 큰 힘 
4월부터 수원 장안문, 과천 경마공원 장기공연

만국기와 울긋불긋한 천들이 휘날리던 대형천막, 온 동네를 다니며 손님을 부르던 알록달록한 복장의 피에로, 둥둥둥!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 현란한 조명의 가설무대와 곡예사…. TV가 없던 시절, 서커스는 서민들을 울리고 웃기는 최고의 볼거리였다.   

동춘서커스단의 전성기는 1960년대부터 10년간. 단원이 250여명에 달할 정도로 10여개 서커스단 가운데 인기절정의 선두였다. 영화배우 허장강 장항선, 음악인 이봉조, 코미디언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백금녀 이주일 남 철 남성남 등이 동춘 소속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접어들어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서커스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1972년 4월에 방영된 TV드라마 「여로」가 동춘서커스단 운영에 치명적이었다. 손님이 없어 공치는 날이 많아진 것이다. 박 단장은 “여로의 선풍적인 인기가 드라마 붐으로 이어지면서 서커스단의 유명 코미디언, 배우, 가수들이 TV로 빠져나가고 악극단, 국극단, 쇼단도 모두 해체됐다.”고 말했다.

당시 주연배우이면서 사회를 보던 박씨도 1975년 동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부산의 여러 극장에서 선전부장으로 3년간 일하면서 돈을 모은 박씨는 1978년 동춘서커스단을 인수해 3대단장이 됐다. 이때부터 오뚝이같은 ‘곡예인생’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o 지난해 11월 해체선언 후 극적으로 재기한 동춘서커스단

그는 고향인 경주에서 고교졸업 후 동네를 찾아온 동춘서커스단 공연을 보고 입단을 결심했다. 무작정 찾아가 3개월의 연습생과정을 거쳐 1963년 단원이 됐다. 조부가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종갓집 장손이어서 집안의 반대가 심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40여 년간 열정 하나로 동춘서커스단을 지키고 있는 그에게 시련은 주기적으로 닥쳤다. 1980년 2월에는 동춘의 흥행몰이 주역이었던 코끼리 「제니」가 난방장치 고장으로 동사했다. 물구나무를 서고 하모니카도 불었던 코끼리의 죽음은 큰 손실이었다.

2003년 전남 광양에서는 태풍 「매미」가 수십억 원 상당의 서커스 천막과 고가의 장비를 휩쓸어 갔다. 지난해 유행한 신종인플루엔자도 동춘서커스단에 막대한 빚을 남겼다. 결국 지난해 11월 15일 서울 청량리 공연을 끝으로 서커스단 해체를 발표했다. 서커스단 역사 84년을 접고 나니 동춘을 살리자는 여론이 비등했다. 동춘서커스살리기 인터넷카페가 만들어지고, 수만 명의 회원이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정부도 동춘서커스단에 관심을 보여 지난해 12월 16일에는 문화관광부 실사를 거쳐 전문예술단체로 등록됐다. 기부금을 공개적으로 모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노동부가 맺은 ‘사회적 일자리창출 업무협약’에 따라 단원 12명은 1인당 월 84만원을 지원받게 됐다.

이같은 국민적 관심에 힘입어 동춘서커스단원 70여명은 심기일전, 지난 4월 1일부터 경기 과천과 수원에서 장기공연에 들어갔다. 공연은 한국마사회가 후원한 과천경마공원 공연장(12월25일까지ㆍ02-3418-3114)과 경기관광공사가 후원한 수원시 장안문앞 무대(6월15일까지ㆍ031-247-3114)에서 매일 3회 열린다. 요금은 대인 1만5000원, 소인 1만원이며 4인이상 가족과 단체는 할인해준다.

지난 6일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공연장을 찾은 필자는 공중비인, 공중실크무용, 훌라후프 70개돌리기, 오토바이 쇼 등의 묘기를 보면서 어린시절 가슴 설레던 서커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동춘서커스단의 기예가 세계최고라는 캐나다 「태양의 서커스단」 못지않게 발전, 우리나라 곡예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바랐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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