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선승 조계종종정 법전스님 자서전 

‘누구 없는가’ 통해 본 수행정진 70 년
10년동안 山門밖 안나선 ‘절구통 수좌’
“부처로 태어납시다” 석탄일 봉축법어

5월 21일은 불기 2554년 부처님오신 날.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85)은 이날을 앞두고 “오늘은 얽매임에서 벗어나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이룩하여 모든 중생이 부처로 태어납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봉축법어를 발표했다. 도를 닦는 마음이 뛰어나 지위를 달아볼 수 없을 만큼의 위치에 오른 참된 인간이 되자는 가르침인 것이다. 

스님은 지난 4월 23일 “사후에 본인 명의의 일체의 재산을 재단법인 대한불교조계종 유지재단에 유증합니다.”는 내용의 유언장도 작성했다. 지난 3월 법정스님 입적 후 우리사회에 큰 울림이 되고 있는 ‘무소유’ 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법전스님은 ‘이 시대의 마지막 도인’ ‘한국불교의 대표선승’으로 불리는 큰 스님이다.


◇ 법전스님이 해인사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사진 해인사 제공)

필자는 지난해 연말 스님의 유일한 저서 「누구 없는가」(김영사 刊)를 읽고 불자가 아니면서도 느낀 바가 많았다. 부처님오신 날을 앞두고 그 자서전을 다시 열독하니 스님 앞에서 설법을 듣는 듯했다. 192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스님은 열네 살 때 백양사 청류암으로 출가, 평생을 수행정진하고 있다.

성철스님(1911~1993)을 30대에 만나 깨달음을 인가(인정)받고 스승이 입적하는 날까지 모셨다. 법전스님은 “성철노장을 시봉하는 생활 자체가 그대로 참선이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출가한 스님을 토굴로 찾아온 부친이 어머니가 위독하니 내려가자고 해도 “저는 출가자입니다.

부모형제를 위해서는 한 발도 옮길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는 스님이다. 며칠 뒤 부음편지를 받아 읽고는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 “청상과부가 외아들이 벼락 맞아 죽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만큼 무서운 각오가 아니면 중이 될 생각 말라.”던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살 때였다.

성철스님은 어느 날 제자들 앞에서 “누구 없는가?”라고 일갈했다. 눈 밝은 수행자를 찾던 스승의 갈급한 법문대로 법전스님이 이제 혼탁한 세상을 향해 “이 시대를 청정하게 이끌 사람, 그 누구 없는가?”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법전스님은 성철, 청담스님 등이 1947년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불교혁신을 주도한 봉암사 결사에도 동참했다.

경북 문경의 희양산 기슭의 봉암사에서 나무하고 일하고 탁발 동냥해가며 자주적으로 절 살림을 꾸려나갔다. 스님은 “발우 하나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니면 천하가 내 집인 것 같았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1956년 문경의 대승사 묘적암에서는 보리쌀 두 가마니를 앞에 놓고 “이것을 다 먹도록 깨우치지 못하면 내발로 걸어 나가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화두(話頭) 하나를 붙잡고 용맹정진을 거듭했다.

한겨울에 닷 되 분량의 밥을 한꺼번에 해놓고 찬밥 한 덩이와 김치 몇 쪽으로 끼니를 때우던 세월이었다. 이부자리도 없이 옷을 입은 채 두세 시간 눈 붙이고 참선하고 나무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1958년 여름에는 태백산 깊은 골짜기 도솔암에 칩거, 10년 동안 산문(山門) 밖을 한 번도 나서지 않고 수행에만 전념했다. 선방에 앉으면 붙박이가 되어버려 ‘절구통 수좌’로 불린 스님은 여든이 넘은 지금도 매일 새벽 108배로 일과를 시작한다.

스님은 “어린 시절 동네 할아버지에게서 ‘인생은 풀잎 끝의 이슬과 같다.’는 말씀을 들었다. 내 나이 팔십하고도 중반에 이르니 이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했다. 스님은 “간청에 못 이겨 책을 내지만 허공을 나는 새처럼 흔적이 없어야 하는데 문자로 한 점의 땟자국을 남기게 되어 허물을 참회하는 한 줄기 향을 올린다.”고 말했다.

스님이 인용한 서산대사(청허선사 1520~1604)의 선시(禪詩)가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다. 천계만사량 홍로일점설(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천만 가지로 생각했던 온갖 것들, 화롯불에 떨어진 흰 눈 한 송이….          /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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