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강조 탓 서울 곳곳 과잉 색상․인공미로 어질

유럽도시들은 화려한 조명보다 비움으로 편안함 줘




지난해 회사 업무출장차 대전의 한 택지지구내 고급 단독주택가를 찾았던 적이 있다. 계절이 여름을 향해 치닫던 그때 필자는 30~40가구 남짓한 그 단독주택가의 예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름대로 고급주택가인 탓에 집들이 독특한 외관으로 시선을 끈 탓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깔끔하게 정돈된 마당, 그리고 무엇보다 각각의 마당을 경계 짓는 담이 보이지 않아서다.

서울 어느 고급주택가의 위압적인 수 미터 높이의 돌담벽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주민들은 현관을 나서면 마주치는 이웃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경계가 모호한 마당 한가운데서 담소를 주고받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 단독주택가에서 담장이 사라진 것은 개발주체가 도시계획과정에서 엄격하게 담장의 높이를 제한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민들 역시 담을 없앤 후 주거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다는 후문이다.

‘디자인’은 최근 국내 각 도시에 예외 없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화두다. 개별 지자체는 물론 중앙 정부까지 나서 도시 설계와 건축은 물론 하천에 이르기까지 국토 전반에 대한 디자인 업그레이드를 추진중이다. 낡은 도로 표지판이 산뜻한 새 표지판으로 바뀌고 아파트 건축 때는 이제 디자인이 인허가 과정의 핵심 사안으로까지 부각되고 있다.

비단 건축에만 머물지 않는다. 최근 도시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공사 중 상당수는 ‘디자인 개선’이 그 목표다. 옛 보도블록을 걷어내고 다양한 문양으로 꾸며진 보도블록이 새로 깔리는가 하면 크고 작은 조형물이 도시 곳곳에 경쟁적으로 들어서다시피 하고 있다.

한동안 가지 않았던 지역을 방문하면 거의 예외 없이 전에 보지 못한 다양한 ‘디자인’을 접하게 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들이 반드시 마음을 즐겁게 하지는 못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눈이 잠깐 즐겁긴 하지만 지나친 조형미, 인공미, 과도한 색상에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필자는 차로 출퇴근할 때마다 어김없이 서부간선도로를 이용한다. 이 도로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길을 가로지르는 ‘오색 창연한’ 무지개 육교를 적어도 서너개는 만나게 된다. 말 그대로 국적 불명의 화려함이다. 이 다리들을 지나면서 드는 생각은 “그나마 졸린 운전자를 놀래키는 효과는 있겠다”는 것이다.

건물 외벽은 ‘채움’의 절정을 보여준다. 10층이 훌쩍 넘는 대형 상가 외벽은 온통 크고 작은 간판으로 빈 틈이 없다. 그것도 모자라 창문까지 형형색색의 글자를 넣어 간판으로 삼을 정도다.

하지만 정작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어떤가. 어지러운 간판에서 내가 찾으려는 가게의 간판을 발견하기란 퍼즐조각 맞추기만큼이나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수많은 간판 틈에서 더욱 돋보이려다 보니 온갖 기괴한 색상, 그리고 심지어 화려하기 그지없는 조명까지 동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디자인 전문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비우는데 인색하다”고 비판했다. 어디든 빈곳이 있으면 그냥 두지를 못하고 그 곳에 뭔가를 채워 넣으려 한다는 것이다. 인구 1000만명이 넘는 거대도시에 제대로 된 광장 하나 가지지 못한 것도 이때문이라는게 그의 지적이다. 그는 사무실 벽면에 걸려있는 세계의 여러 광장을 보여주면서 “그냥 비어있다는 것 자체로 얼마나 훌륭한 디자인이냐”고 필자에게 되물었다.

우리가 흔히 디자인 도시의 모범으로 꼽는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잘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 어떤 곳에서도 화려한 조명이나 색상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을 만들고 꾸미려 하기보다 그냥 비우고 남겨두는 것, 그럼으로써 그속에 있는 사람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 디자인은 바로 거기에서 출발하는게 아닐까.

담장이 없어진 주택가가 더없이 편안하고 따듯하게 느껴지는 것 역시 무엇을 채웠다기 보다는 (담을) 비워냈기 때문이다.

6·2지방선거를 통해 지방자치단체를 4년간 책임지게 될 새로운 민선 자치단체장들이 채움 보다는 비움의 미학에 더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갖기를 기대해 본다. /정두환 서울경제신문 부동산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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