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전쟁 60주년의 해이다. 세월이 그토록 흘렀는데도 분단의 상처는 아물 줄 모른다. 여느 이산가족이 그렇겠지만 원로시인 이경남씨(81ㆍ한국발전연구원 고문)가 6.25를 맞는 감회는 남다르다. 황해도 안악 태생인 이씨는 고교시절 같은 동네 여중생 ‘장일숙’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좋아했다. 첫사랑이었다.

     한국전쟁 60주년 맞는 이경남 시인  

     22세에 북한군소위되어 전투중 귀순  

     육군장교로 구월산 반공유격대 선봉

     팔순의 오늘도 고향 그 소녀 못잊어

◇원로시인 이경남씨는 오늘도 북녘의 첫사랑 소녀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씨는 전쟁이 일어나자 평양사범대 국문과를 중퇴하고 22세의 나이에 북한군 소위로 전쟁터에 나갔다. 전투가 치열하던 그해 10월에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귀순, 한국군 소위가 되면서 그의 인생은 극적으로 반전됐다.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할 때는 고향땅을 밟았고 첫사랑도 만날 수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월산 반공유격대 참모장이 되어 같은 부대원인 ‘장일숙’과 함께 유격전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1953년 7월 휴전직후 남쪽으로 철수하는 혼란 속에서 첫사랑을 다시 잃어버렸다. 금성충무무공훈장을 받고 정훈장교로 복무하던 이씨는 ‘장일숙’도 월남했으리라 믿고 애타게 찾았다.

1955년 창간된 《현대문학》9월호에 ‘張一淑’이란 필명으로 시 「별」도 투고했다. 별처럼 떠오르는 첫사랑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투고자를 ‘張一淑’으로 한 것은 혹시 그녀가 시를 보고 잡지사에 연락하지 않을까하는 한가닥 희망에서였다.

그러나 허사였다. 1957년 육군중위로 전역한 이씨는 같은 해 《현대문학》8월호에 북창(北窓)이란 시로 박두진 선생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이씨는 추천완료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북창에는 참으로 많은 잃어버린 얼굴들이 서러운 행렬을 짓고 흘러갑니다. 소학교 5학년 때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뒤로 이제는 오로라의 여인으로 불려질 장일숙 양이 ‘별’을 나직이 외우며 꽃가마에 실려 따르고 있습니다.…”

《신태양사》란 잡지사 편집장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그는 북쪽으로 창이 나있는 하숙방만 골라 다니며 살았다. 북창을 통해서나마 고향을 생각하고 첫사랑과 연결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 무렵 부친의 권유로 같은 고향사람과 결혼해서 오늘날까지 해로하고 있다.

이씨는 결혼 전 신부와 장인될 사람에게 장일숙 이야기를 털어놓고 이해를 구했다. 그래서인지 필자가 최근 서울 광진구 자양동 이씨의 자택을 찾아간 날도 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인터뷰에 응했다.

《월간문학》2009년 7월호에 발표한 「장일숙, 그대 있으매」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장일숙 그대 있으매/ 내 심장은 세월을 거슬러 아직도 뛰고/ 밤하늘 별밭에서 그리움의 눈시울을 적시며/ 두 여인을 사랑할 줄 아는 슬기도 익혔으니/ 그대여, 지금은 어느 영마루에서/ 꽃수 놓은 손수건을 흔들고 계시는가?/

이씨는 현역시절 현대경제일보 편집국장과 전무를 거쳐 《현대공론》《월간동화》 발행인 등을 지내고 한국발전연구원장을 역임했다. 자서전 「자유를 위한 회고록」과 우리나라 현대사 관련저서 10여권을 낸 바 있는 이씨는 귀가 약간 어두울 뿐 건강한 편이어서 매일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고 집필도 왕성하게 하고 있다.

지리산 빨치산과 자신이 활약했던 구월산 유격대를 비교연구하는 글도 쓰고 있다. 이씨는 “자전적 소설과 이산가족을 주제로 한 책을 발간하는 일이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장일숙의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북창은 아니지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창가에 선 노시인의 눈빛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고 묻는 듯했다. 전쟁은 이렇게 한 인간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남겼다. 그 6.25가 다가오고 있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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