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국민애창곡 「소양강 처녀」의 노랫말이다.

객지생활 30년접고 귀향한 윤기순씨 
춘천 지암계곡서 4년 째 음식점 운영
강변의 처녀상과 노래비는 관광명소
처녀시절, 고기잡던 부친이 초대한 반야월씨가 작사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 호반순환도로를 달리다 보면 아치형 소양2교가 보이는 의암호 변에 우뚝 세워진 소양강 처녀상을 볼 수 있다. 높이 5m의 좌대위에 7m 크기의 청동상으로 제작된 처녀상은 국내에 현존하는 여인 조형물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처녀상 앞에는 화강암에 가사를 새긴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 버튼을 누르면 구성지면서도 애절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특히 이 일대는 조명시설이 잘 돼있어 야경이 아름답다. 처녀상과 노래비는 2005년 11월 춘천시민의 날을 기념해 건립된 뒤 이 도시를 상징하는 명소가 됐다. 처녀상 바로 옆에는 KBS드라마 「겨울연가」촬영지임을 알리는 벤치가 나란히 있어 동남아 한류관광객들의 단골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반야월 작사, 이 호 작곡의 「소양강 처녀」는 1969년 가수지망생 김태희가 불러 히트했다. 당시 톱가수 남 진의 「님과 함께」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와중에서도 LP음반이 10만장 이상 팔려나갔다. 트로트곡인 「소양강 처녀」는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의 애창가요지만, 소양강 처녀가 실제인물이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주인공은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삼악산 줄기아래에 있는 한방요리전문점 「풍전가든」대표인 윤기순씨(58). 결혼을 하지 않은 윤씨는 2006년 6월 고향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닭백숙, 오리로스 등을 팔며 민박도 하는 음식점을 차렸다. 필자는 지난 6월 15일 윤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풍광이 수려한 지암계곡 집달리골을 찾았다.

‘열여덟 딸기 같은 소양강 처녀’는 온갖 풍상을 겪고나서 환갑을 바라보는 여인이 돼 있었다.

윤씨는 노모(75)곁에서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7남매의 맏딸인 윤씨는 1968년 동생들의 학비라도 벌기 위해 서울로 갔다.

그는 을지로에 있던 「한국가요반세기 가요작가동지회」에서 전화도 받고 심부름를 하면서 노래도 배웠다. 「…가요작가동지회」에는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소속돼 있었다.

회사에서 윤씨는 「소양강 처녀」로 불리며 귀여움을 받았다. 소양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던 윤씨의 아버지는 어린 딸을 보살펴주는 동지회 사람들에게 매운탕을 대접하겠다며 고향 집으로 초대했다.

나룻배에 솥과 장작을 싣고 손님들을 상중도로 안내했다. 그 섬에서 어죽을 끓여 대접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소나기가 내렸다.

비가 그친 뒤 해맑아진 소양강의 풍광에 18세 처녀(윤씨)를 오버랩 시켜 반야월 선생이 시상(詩想)을 메모해둔 것이 「소양강 처녀」의 노랫말이 됐다.

윤씨는 그해 가을부터 30년 가까이 밤무대 가수가 되어 전국을 다녔고 일본에서 5년 동안 노래 부르기도 했다. 수입이 생기면 고향집에 송금하면서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윤씨는 「소양강 처녀」가 자신이라는 사실도 한참 후에 알았다.

반야월 선생이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노래에 얽힌 사연을 말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서 그를 수소문했지만 나서지 않았다. 극장식 나이트클럽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2001년에는 부친이 별세, 밤무대 가수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윤씨는 “그 노래를 들으면 꿈 많던 처녀시절이 떠오른다.”며 “처녀상과 노래비까지 세워준 분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윤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처녀상을 찾았다. 노랫말처럼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고 있었다.     /설희관 <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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