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제65주년 광복절이 다가오고 있다. 내년에 미수(米壽ㆍ88세)를 맞는 원로언론인 황경춘씨에게 해마다 돌아오는 광복절은 자신이 겪은 격동의 세월을 비춰주는 주마등이 된다. 1943년 5년제 진주중학(현재 진주고)을 졸업한 황씨는 1945년 3월 서울 용산의 일본군 사단에서 6주간 군사훈련을 받고 4월 하순 일본 이바라키현(茨城縣)의 특수부대에 배속됐다. 그는 이곳에서 대공참호파기와 땔감나무 줍기 등의 노역에 시달렸다.

황경춘 전 미국 AP통신 서울지국장
진주중 졸업후 일본특수부대 끌려가
정부수립부터 5공까지 현대사 증인
8순의 동문 6명 매달1회 만나 회포

◇원로언론인 황경춘(왼쪽)씨가 서울 인사동 ‘선천’앞에서 조문제 박사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8월15일 낮 12시, 일본천황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으나, 황씨는 조국광복의 소식을 다음날에야 알았다. 내무반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가 이웃 농가에서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뉴스를 들은 것이다. 그 후 일본육군 일등병으로 제대한 뒤 8월 말 시모노세키(下關)항에서 군용선을 기다리다 지쳐 여러 명이 밀항선을 구해 구사일생으로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돌아왔다. 황씨는 “청운의 꿈이 꺾이고 일본군에 징병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수많은 반도출신 갑자생(1924년생)의 한 사람으로서 광복절이 돌아오면 가슴 깊은 곳에서 괴로운 추억의 한 토막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광복 후 황씨는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를 중퇴하고 미군정청과 USIS(미국문화원) 등에서 일했으며 1957년 미국의 세계적인 통신사 AP에 입사, 1987년까지 30년 동안 서울지국 특파원과 지국장을 지냈다. 정부수립 후부터 5공화국에 이르는 우리나라 현대사를 몸으로 뛰며 취재한 셈이다.

1980년대에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TIME의 서울지국 기자와 주한미국대사관 신문과장도 역임했다. 황씨는 파노라마 같은 취재현장 중 4.19혁명을 잊을 수 없다. 이날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총기발사로 첫 사상자가 발생한 현장에 있다가 인근 다방으로 뛰어 들어가 송고한 기사가 특종뉴스가 되었던 것이다. 195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어선을 나포, 선원 150명을 부산의 수용소에 가둔 사건이 있었다. 황씨는 이들의 석방결정을 단독취재해서 수용소 내부 사진까지 곁들여 AP 도쿄지사로 송고, 세계적인 특종도 했다. 황씨는 최근 한국전쟁 당시 AP 도쿄지국 사진부장으로 절친했던 맥스 데스포(Max Desforㆍ97)씨를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다.

데스포씨는 1951년 1월 대동강 철교 위의 피란민 행렬을 카메라에 담아 그 해 미국의 퓰리처상을 받았다. 황씨는 지난 6월22일부터 8월2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퓰리처상 사진전에 초대받은 데스포씨를 만난 것이다. 30대였던 데스포씨는 유엔군이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퇴각할 때 뒤틀린 대동강 철교 난간에 개미떼같이 붙어있는 피란민들을 향해 얼어붙은 손으로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상당수는 강 아래로 떨어졌다. 황씨는 “투박하고 무거운 구식 사진기로 목숨 걸고 찍었던 평양의 그날을 회상하는 데스포씨의 감회어린 표정에 숙연해졌다.”고 말했다.

황씨는 요즘도 기명칼럼을 쓰고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일본의 유력 신문 등을 열독하느라 컴퓨터 앞에서 하루 8시간 정도를 보내고 있다. 그는 매월 14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진주중학을 14회로 졸업한 황씨와 동문들이 25년 전부터 「14회 모임」을 서울 인사동 한식집 「선천」에서 갖는 날이기 때문이다. 졸업생이 두 학급에 92명이었으나 현재는 12명만 생존해있고 이 가운데 서울에 거주하는 6명이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김일두 변호사(전 대검차장), 조문제 박사 등이 회원이다. 황씨는 “향이 타 내려가 재가 되듯 모임은 유한하지만 소중한 동지애와 우정은 무한하다.”고 말했다. 백수(白壽)까지 그의 건필(健筆)을 기원한다. /설희관 <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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