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이란 인기외화가 있었다.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그 대학을 졸업한 한국청년이 최근 국내에서 가수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 가요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창력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주인공은 재미동포 2세인 폴백(25ㆍPaul Baek 백지훈). 그의 학력 등 프로필은 화려하지만 성장과정을 들어보면 어려서부터 받은 인종차별을 잘 견뎌낸 대견함이 돋보인다.

     폴백 미니앨범 ‘바보야’가요계 주목
     고교 수석졸업, 수학동아리 全美회장
     인종차별과 향수가 내 음악의 자양분
     유명작곡가 전해성 지도로 2집 준비

◇폴백은 “어려서 겪은 인종차별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음악적 자양분”이라고 말한다. (사진 제이오션스타 제공)


 

루이지애나에서 태어난 폴백은 플로리다의 주도인 텔라하시에서 성장했다. 그곳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에는 중국학생과 폴백 두 명뿐이었고, 로턴차일스 고교에서는 전교생 2000여 명 중 4~5명에 불과했다.

플로리다 바닷가로 가족여행을 갔던 어린시절, 폴백은 누나와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지나가던 백인들이 “너희들 왜 여기 있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한 말을 아직도 잊지못하고 있다. 중고시절에는 백인학생들이 “백 투 차이나(중국으로 돌아가)”“칭칭칭”하며 조롱하고 놀려댔다. 청소년기에 인종차별을 겪으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백인학생들의 위에 서고 싶었다. 고교시절에는 하루 4시간 자면서 책과 씨름해 4년 동안 줄곧 1등이었다. 수재들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수학경시대회 동아리 「뮤알파세타」의 전미(全美) 회장직도 맡았다. 유기견보호센터에서 일하고 노인정 방문봉사 등 다양한 경험도 했다.

그 무렵 뉴욕대에 다니던 누나가 여름방학이면 한국의 가요CD를 여러 장 가지고 왔다. CD를 들으면서 한국인이란 자긍심을 느꼈고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부모님에게 한국에 가서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60)는 “하버드대학에 합격하면 졸업 후 가수가 되어도 좋다.”고 조건부로 허락했다.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폴백은 하버드대학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개교3년 만에 첫 하버드 생을 배출한 모교는 잔치분위기였고 지역사회에서 큰 화제가 됐다.

폴백은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연구하기 위해 차별심리학을 전공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본어에도 능통한 그는 2007년 여름 일본 메이저 음반사인 BMG 재팬(현재 소니뮤직재팬)에서 두 달간 인턴사원으로 일했다.

이듬해 대학 졸업성적이 4점 만점에 3.7점이었다. 좋은 직장 등 미래가 보장된 미국을 떠나 폴백은 2008년 7월초 귀국, 가요계에 데뷔했다. 최근 발표한 미니앨범에는 타이틀곡 ‘바보야’를 비롯해 7곡이 수록돼있다.

이 가운데 ‘쉬 She’는 영어버전 가사를 직접 썼다. 윤도현의 ‘사랑했나봐’ 이승철의 ‘긴 하루’ 등을 작사 작곡한 유명 프로듀서 전해성씨가 곡을 만들었다. 데뷔 곡 ‘바보야’는 폴백의 자전적인 노래이다. 흑인음악을 많이 접한 탓인지 음색이나 창법이 미국 본류의 음악 스타일로 부드럽고 편안하다는 평을 듣고있다. 전해성씨의 ‘제이오션스타’에 소속된 그는 오는 11월 선보일 제2집 준비에 여념이 없다.

폴백은 캘리포니아 주립대를 졸업한 가수 겸 작곡가 김조한씨와 버클리음대 영화음악과 출신의 가수 김동률씨, 컬럼비아대 영문과를 졸업한 박정현씨(여) 등을 자신의 멘토로 여기며 가수생활을 하고 있다. 중고교시절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한국을 그리워했고 가수가 되는 꿈을 키워왔던 것이다.

폴백은 “가수로서 성공한 뒤 음반제작 및 유통과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것이 꿈”이라며“기회가 주어지면 NGO(비정부기구)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려서 겪은 인종차별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자신의 음악적 자양분이라고 말하는 폴팩. 그의 앞날이 밝아 보인다.  /설희관 <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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