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김일두 변호사(88)는 미수(米壽)의 나이에도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서울 중구 충무로 극동빌딩 613호실로 매일 출근한다. 그의 사무실은 책상과 소파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책과 사건기록 서류더미로 꽉 차 발 디딜 틈이 없다.

무료변론 1만5천회 기록 김일두 박사
무죄판결 이끌어내 누명벗길 때 희열
육영수 여사 저격한 문세광 수사지휘
수필가로도 명성, 수석과 사진애호가

경남 남해 출신인 김 변호사는 고려대 정법학과를 나와 1948년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대전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대전지검장, 서울지검장, 광주고검장 등을 거쳐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역임했다. 서울지검장이던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 사건의 수사본부장을 맡았다. 1981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 극동빌딩의 터줏대감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의 인생기록에서 돋보이는 것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일이다.

2000년 12월 8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무죄판결(당시 50여 건)을 가장 많이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돈이 없어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까지 1만5천 회 이상 무료변론을 했다.

김 변호사는 사건을 맡으면 직접 팔을 걷어붙인다. 상담도 사무장한테 맡기는 법이 거의 없다. “어떻게 하면 곤경에 처한 피의자의 방어권을 최대한 보장해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권변호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자신의 무죄변론활동을 ‘억울타, 난 죄 없어’라는 제목의 3권짜리 변론집에 정리했다.

◇김일두 변호사가 자신의 ‘법조60년 화보집’을 펼쳐 보이며 지난 세월을 말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죄변론으로는 ‘우유배달청년사건’을 꼽았다.
1992년 서울 봉천동에서 3건의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살인용의자는 20대 우유배달원.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김 변호사는 2심부터 무료변론을 자청하고 나섰다. 열심히 살다가 누명을 쓴 청년의 딱한 처지가 안타까웠다.

당시 경찰은 청년이 20㎝ 크기의 칼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살인했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칼을 넣고 다녔다면 호주머니 안에 찔린 흔적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찰이 제출한 바지의 호주머니는 말짱했다. 법정에서 끈질지게 무혐의를 입증해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그는 일본어에 능통해 주한 일본대사관의 법률상담역을 맡고 있으며 일본어로 소송을 진행시키는 몇 안 되는 변호사로 손꼽힌다. 김 변호사는 《新 형벌법》《민사에 관한 상고이유서》 등 30여 권의 저서를 낸 법학박사이자 문학박사이며 원로수필가이다.

2009년 2월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한국사찰편액(扁額)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서예학전공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국사찰의 대웅전 등에 걸려있는 편액(액자)글씨의 계통을 조사하고 분류한 것이다.  10여 권의 수필집을 발간해 ‘법조문인’으로도 불린다.

사진촬영과 수석(壽石)채집도 전문가 수준이다. 소형영화 취미단체인 한국8㎜동인회를 만들어 회장을 오랫동안 지냈으며 개인 수석전도 열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뜻깊은 세 가지 회(回)를 했다. 회갑과 회혼을 지냈고 48년 사법시험 합격의 회방(回榜)도 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노년에 접어들어 10년마다 새롭게 인생의 출발점에 선다. 회갑(回甲ㆍ60)에 《낙조는 불탄다》, 고희(古稀ㆍ70) 때는 《아쉬운 세월이여》, 망구(望九ㆍ81세)에는 《인생 다시 하고픈데》라는 문집을 발간하면서 자세를 가다듬은 것이다.

고령에도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은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생활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요즘도 밤 9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바로 취침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난다. 맑은 정신으로 소송관계서류를 챙기고 조간신문 3~4개를 정독한 뒤 글도 쓴다. 법조계의 전설, 김일두 변호사의 황혼이 아름답다. /설희관 <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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