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3대째 산장주인 백운대 정상서 화촉’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신랑 이영구군(35)과 신부 김금자양(25)이 다음날 오전 11시 대한산악연맹회장인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화창한 봄날 북한산 백운대(836.5m)에서 인수봉(804m)발치의 백운산장까지 수많은 산악인의 축복을 받으며 내려가는 행복한 한 쌍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백운산장 지킴이 팔순의 이영구씨
45년전 백운대정상서 결혼식 화제
조난구조 항상 앞장 1백여 명 구해
代이은 장남 매일 산장으로 출퇴근

두 사람은 그날 이후 산수(傘壽ㆍ80)와 고희(古稀ㆍ70)를 맞은 오늘까지 백운산장에서 해로하고 있다. 도라산으로 유명한 경기도 장단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이씨는 15세부터 산사람이 됐다.

필자는 최근 우이동 도선사에서 단풍이 곱게 물든 하루재를 거쳐 산장의 노부부를 찾았다. 이씨는 조부가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부터 기거하던 터전에 1960년 백운산장을 지었다. 조난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산장이 구조본부 역할을 했고 이씨는 한밤중에도 자일을 메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가 목숨을 구한 사람만 100여 명에 달했다.

◇백운산장에서 45년간 해로하고 있는 북한산의 산증인 이영구씨 부부.

1983년 4월 인수봉을 암벽등반 중이던 대학생 7명이 숨지는 대형 조난사고가 발생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어 사고가 나면 우이동까지 사람이 뛰어 내려가야 했다. 어려움을 지켜본 악우회(岳友會)라는 산악회가 같은 해 5월 산장에 번호가 0909인 직통전화 1회선을 기증했다.

북한산과 도봉산에 상주하는 경찰산악구조대도 그 무렵 창설됐다. 백운산장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설립된 1987년 또 한번의 위기를 맞았다. 공단이 전국의 국립공원에 산재해있던 개인소유의 산장(대피소)을 모두 없애거나 직영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북한산을 즐겨 찾는 산악인들이 구명에 나섰다. 백운산장은 3대에 걸친 역사성과 그들의 산사랑 진정성이 공단 측을 움직여 ‘향후 30년간 운영’이란 조건부로 활로가 트였다. 산사나이들의 사랑방이 된 산장은 1992년 초여름 가스버너 취급부주의로 불에 탔다.

산악인들은 즉시 현장에 모금함을 설치하고 건축성금을 모았다. 이씨 가족은 5년 동안 천막생활을 하면서 건축자재를 헬기로 공수해 1997년 6월 현재 모습의 백운산장을 세웠다. 건평 50여 평에 매점과 휴게실도 갖추고 2층에는 통나무로 60여 명의 잠자리를 만들었다.

白雲山莊이란 현판 글씨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생의 친필이다. 선생은 양정고보 산악회원들과 인수봉 암벽등반을 즐기던 젊은 날의 인연으로 휘호를 남긴 것이다. 이씨는 “당시 선생님께서 병석에 계셔 현판식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가서 보여드렸다”고 회상했다.

산장에는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충전식 배터리를 사용하고 있어 어려움이 많다.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백운산장 입구에는 ‘백운의 혼’ 충혼탑이 등산객들을 맞는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한 국군장병 2명의 혼을 기리는 탑이다.

슬하에 3남2녀를 둔 이씨는 요즘도 우이동까지 한걸음에 다녀오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장남 건씨(48)는 성남의 집에서 매일 북한산으로 출퇴근하면서 4대째 산장을 운영하고 있는 효자이다. 주말에는 부인까지 와서 매장에서 주문을 받고 잔치국수를 만다.

차남 인덕씨(46)는 어려서 깔딱이 또는 백인이로 불렸다. 가까운 산악인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산기를 느낀 어머니가 하산도중 깔딱고개에서 아기를 낳았다해서 깔딱이, 백운대와 인수봉의 정기를 받고 자라라는 뜻에서 백인이가 된 것이다.

그는 독일유학을 다녀와 청계산 기슭에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을 차린 산악인이다. 이영구씨 가족의 북한산 사랑은 유서 깊은 백운산장에서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설희관<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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