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 단국대 초빙교수의 문화 사랑
신성일 엄앵란 결혼등 숱한 특종기사
대중가요 DJ도 처음한 베테랑 산악인
동양인 최초의 FIAF부회장 역임 보람

정홍택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초빙교수(74)는 평생을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 돈벌이를 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정통 문화예술인도 아니다. 한국외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1963년 견습기자 15기로 한국일보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그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1986년 출판국장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나 전문분야가 된 대중문화예술의 곁으로 갔다.

그의 경력을 보면 문화예술의 외연을 넓히고 내실을 기하기 위해 애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술의전당 운영국장, 공연윤리위원회 사무처장 영상물등급위원회 등급위원,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한국일보 문화부에서 영화ㆍ연극을 담당하다가 회사가 주간한국을 창간하자 연예부 기자가 됐다. 그래서 지금도 연예기자 1호로 불리는 그는 최초로 한 일이 많다. 연예라는 말 자체도 그가 만들었다.

대중가요 디스크자키도 1호.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 라디오의 가요중계실 DJ로 대중가요만으로 매일 두 시간씩 4년간 생방송을 진행했다. 뉴욕에서 기자생활을 하던 1976년에는 뉴욕대 부설 와인스쿨 8개월 과정을 한국인 최초로 수료했다.

그래서인지 정교수는 “와인 석 잔과 잘 구워진 마늘빵 두 개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라고 처음 번안했고, 남진의 노래 ‘낙도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라고 제목을 고쳐 히트곡을 만들었다.

◇연예기자 1호인 정홍택 교수. 그는 칠순의 나이에도 네루스타일 재킷을 즐겨 입는다.

DJ시절 보컬이름이 없던 임창제ㆍ이수영을 방송에서 즉흥적으로 ‘어니언스’라고 소개해 그들이 포크계의 전설이 되는데도 일조했다. 그는 최무룡ㆍ김지미(1963년) 신성일ㆍ엄앵란(1965년)커플의 결혼 등 굵직한 특종을 잊지 못한다. 마당발인 그가 갖고 있던 정보력의 산물이었다.

하루 종일 남산(KBS)과 종로2가(기독교방송) 인사동(MBC)을 거쳐 영화가인 충무로를 순회했다. 밤에는 연예인이 출연하는 밤무대를 드나들면서 취재했다. 길옥윤ㆍ패티김씨의 결혼식에는 청첩인으로 피로연 사회를 맡았고 두 사람이 헤어질 때는 조선호텔에서 이혼식 사회를 보게 된 기연(奇緣)도 있다.

정교수는 한국영상자료원(KOFA)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0년, 스페인에서 개최된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 정기총회에서 동양인 최초로 부회장에 선출돼 4년간 일한 것을 큰 보람으로 삼고 있다. 2002년에는 FIAF 정기총회를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서울로 유치했다.

KOFA는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모든 영화의 필름은 물론 시나리오, 포스터, 스틸사진 등 관련 자료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집 보전하는 기관. 우리나라가 1985년에 가입한 FIAF는 1938년에 창설됐으며 유네스코 다음으로 규모가 큰 세계적인 기구로 65개국 130여 개 영상자료원이 가입돼 있다.

정교수는 미국에서 10년간 살다가 1982년 9월 귀국했을 때 공항에서 북한산으로 직행, 인수봉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산을 사랑한다. 1971년 악우회 창립회장이 된 그는 산악인으로도 유명하다.

정교수는 최근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X파일’등의 언론보도를 통해 지난날을 회고했다. 그는“비하인드 스토리 때문에 나의 건재를 싫어하는 연예인이 더러 있다”며“그러나 남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강의실로 떠나는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정홍택의 X파일은 영원히 밝힐 수 없습니다”           /설희관 <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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