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창신2동 대원이발기술학원 남정영 원장(67)은 이ㆍ미용업계에서 알아주는  테크닉 강사이자 솜씨 좋은 이발사이다. 그렇다고 두 손에 가위와 빗을 들고 돈 만 버는 그런 기능인이 아니다. 40년째 자신의 생업 보다 사회봉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의 가위 손’ ‘마당발 이발사’로 불리기도 한다.

남정영 대원이발기술학원장의 인생
16세 때 고향 떠나 고달픈 서울살이
독보적인 기술로 40년째 이웃 섬겨 노인정 양로원 찾느라 생업은 뒷전  

남 원장의 무한봉사는 궁핍하기 짝이 없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에서 비롯됐다. 그는 1958년 발행된 오백 환짜리 지폐 한 장을 평생 지갑에 넣고 다닌다.

한국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고 집안이 너무 어려워 16세 때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무작정 상경하던 날. 어머니가 옷 보따리 속에 넣어준 오백 환권 두 장 가운데 한 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아무리 배가 고프고 잠잘 곳이 없어도 이 돈만은 악착같이 쓰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해왔다.”고 말했다. 종로의 한약방에서 2년간 숙식하며 허드렛일을 할 때만 해도 검정고시를 준비해서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남정영 원장은 이발봉사를 하면서 삶의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19세의 나이에 무궁화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가 이발기술을 익혔다.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1년 과정을 마치고 자격증을 따기도 전에 실습조교를 하면서 원생들을 지도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1965년에는 백마부대 하사관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으며 어느 정도 홀로서기를 하게 된 1971년 결혼한 뒤에는 이용학원 강사로 열심히 살면서 틈틈이 봉사활동을 했다. 3년 뒤 현재의 4층 건물을 매입해서 2층에 학원을 차렸다.

이때부터 인근의 낙산공원과 노인정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이발봉사에 나섰다. 1983년부터 창신2동 2통장을 맡아서는 소년소녀가장과 결손가정 아이들을 돌보고 방범활동에도 주력, 동네가 7년 연속으로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돼 서울지검장 표창장 등을 잇달아 받았다. 1991년부터 10년간 소년소녀가장 13명을 추천받아 연 2회 장학금을 주어 자립을 돕기도 했다.

그는 매일 오전 학원으로 찾아오는 노인 10여명의 이발을 해주면서 일과를 시작한다. 오후에는 원생들을 지도하고 영업도 하지만 이발기구를 가방에 챙겨 밖으로 도는 시간이 더 많다. 그의 커트기술은 눈을 감고도 해낼 만큼 뛰어나다.

오른손에 빗과 가위를 한꺼번에 잡고 머리를 다듬는 솜씨가 놀랍다. 일에 열중하기 위해 휴대전화도 집에 놓고 다닌다. 학원에는 봉사일정표가 붙어있다. 요일 별로 주말도 없이 창신2동 노인정, 명륜3가 유림노인정, 종로사회복지관, 청운양로원 등 17곳을 순회하면서 봉사한다.

그러다 보니 행정자치부장관, 서울시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의 표창장과 감사장을 숱하게 받았다. 지난해에는 서울시 봉사상 본상을 수상했다. 이발을 하면서는 노인들의 말벗이 되어준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천 원짜리 한 장을 소파 옆에 슬쩍 놓고 가는 어르신도 많다. 남 원장은 “이발 후 환하게 웃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 삶의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몇 해 전에는 단골로 다니던 동네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가 이발을 해드렸다. 며칠 뒤 그분의 아들이 찾아와 “단정하게 이발하신 모습으로 돌아가셨다.”며 큰 절을 했다.

언제부턴가 이ㆍ미용사를 헤어디자이너라고 부른다. 그러나 남 원장은 자신의 인생을 봉사라는 천 조각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에너지 넘치는 디자이너이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취재기념으로 필자에게 이발을 권했다. 거울에 비친 머리스타일을 보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설희관 <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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