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과 지리산 사람 박남준 시인  
전주 모악산 움막에서 12년 살다가 
7년 전 하동군 동매리 토담집 정착
관값 예금해두고 풍경소리 벗 삼아

지난해 12월 3일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악양면 동매리 박남준 시인(54)의 산방 심원재를 찾아가는 길의 풍광이 아름다웠다. 강물이 햇살에 반짝이는 섬진강 변을 굽이쳐 돌다가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의 끝동네 지리산 자락. 파란 양철지붕의 10평 남짓한 토담집에서 시인은 홀로 살고 있었다.

전남 법성포가 고향인 박씨는 전주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을 통해 등단했다. 버들치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미혼으로 이 집에서 7년째 살고 있다. 박씨는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의 ‘산천재’라는 서재에서 은거하던 남명 조식 선생같이 깊은 뜻이 있어 여기서 사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KBS TV 구성작가로 잘 나가다가 1991년 사표를 내고 전주로 내려가 우진문화공간 관장으로 일했다. 어느 날 모악산 등산길에서 길을 잃었다. 날이 저물어 산모퉁이 계곡의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무당이 살다가 떠난 음습한 폐가였다. 이곳에서 출퇴근하다가 돈을 쓰지 않는 삶을 택해 1년 만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박남준 시인이 깎은 감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집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겨울에는 외풍이 너무 심해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 선생의 ‘한서이불과 논어병풍’이 생각났다. 1995년 이름이 알려져 청탁이 밀려왔다. 처음엔 즐거웠으나 글쓰기에 매몰되기 싫어 해남 미황사를 찾아가 단식을 한 후 화순의 후배 집에 잠시 머물던 여름날이었다.

산비탈에서 땡볕에 밭을 매고 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다음날 그분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가셨다. 툇마루에는 100만 원이 예금된 통장과 목도장이 놓여 있었다. 관 값에 써달라는 글도 있었다. 박씨는 할머니의 세간 중에서 놋수저 한 벌을 가져왔다.

누룽지 긁는 용도로 쓰던 숟가락의 목이 부러져 무심코 마당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잔설이 녹기 시작한 땅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고 사금파리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숟가락이었다. 할머니의 관 값이 생각났다.

그래서 박씨는 사후에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관 값 200만 원을 통장에 넣어두고 산다. 몸이 자주 아픈 박씨의 산속거처를 다녀간 지인들이 강제이사를 ‘모의’했다. 미황사의 금강스님과 모 박물관장이 현재의 동매리 집을 박씨 명의로 몰래 사들였다. 하동법률사무소에서 집문서를 찾아가라고 몇 차례 연락이 왔지만 “찝찝해서” 1년 동안 모른 체했다. 그러나 선후배들의 우격다짐을 못 이겨 2003년 9월 동매리로 이사했다.

양지바른 집 옆의 계곡, 조그만 연못, 원두막이 감나무 숲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준다. 대문조차 없는 집의 방문에 자물쇠는 무용지물이다. ‘뎅그렁’ ‘뎅그렁’ 처마 끝의 풍경소리와 적막은 산사를 닮았다.

그는 원고청탁을 많이 받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 벌어 교통비와 담배ㆍ소주 값과 최소한의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는 시민단체에 기부한다. 한식요리솜씨가 뛰어난 박씨는 철 따라 매실, 녹차, 곶감농사를 지으며 무욕의 정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2004년 수경, 도법스님 등과 1년 동안 1500리를 걷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도 했다. 현재는 환경단체인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 대표와 지역문화모임인 ‘지리산학교’에서 시 문학반 강사를 맡고 있다. 2008년에는 지역민과 귀농ㆍ귀촌자들과 ‘동네밴드’를 결성해서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있다.

박씨는 최근 펴낸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시집에 ‘외딴 집 감나무 한 그루, 세상의 하늘이 환하네’라고 써서 필자에게 주었다. 자가용도 없는 그의 호출을 받은 후배가 몰고 온 차를 타고 우리는 이날 밤 지리산학교 작품발표회가 열리는 하동군 문화회관으로 향했다. 1급수에만 산다는 버들치가 지리산에도 살고 있었다.    /설희관 <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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