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범밴드’ 싱어송라이터 권용범 씨
암수술 세번받고 일어나 희망을 노래
따뜻한 음악으로 상처받은 사람 치유  
소아암 완치자들에게 다리 되어 봉사

고통에는 뜻이 있고,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용범밴드’리더인 싱어송라이터 권용범 씨(32)와의 대화 중에 문득 떠오른 구절이다.

그는 암 수술을 세 차례나 받고도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권씨는 고교 1학년 때 록밴드 리시(Leash)를 만들어 100회 이상 라이브로 연주하며 음악에 빠져 살았다. 숭실대 영문과에 진학해서는 홍대 앞 지하클럽에서 베이스와 보컬로 활동한 록커였다.

2002년 말 육군 최전방부대를 제대한 뒤 다시 뮤지션의 나래를 펴려는 순간 활막육종이라는 희귀암 진단을 받았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장벽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넘으려 했다.

“오른쪽 목과 어깨 뼈 일부분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땐 정말이지 노래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음악이 저를 꼭 낫게 해주리라 믿었지만 고통이 너무 심했어요. 병세가 호전되나싶더니 2003년 말 이번에는 폐암이었습니다.”

폐 일부를 잘라내고 8개월간 항암치료가 다시 시작됐다. 멤버들이 뿔뿔이 흩어져 밴드도 해체됐다. 가깝던 사람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이 가슴 아팠고 서러웠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외롭고 억울해서 많이 울었다. 그

렇게 사위어 가던 어느 날 6인 병실의 풍경이 그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됐다. ‘노래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라며 음악에만 푹 빠져 외길로 살던 젊은이의 눈에 ‘사람과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그때까지 사람보다 음악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이 없었죠.

그런데 같은 병실의 환자들을 보면서 사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깨달았습니다. 음악이란 우물 속에서만 살다가 세상 속으로 나온 것입니다.” 권씨의 병실에 있던 환자는 장군, 교수, 카메라 맨, 양계장 주인, 중국집 배달원 등이었다.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또 다른 세상을 본 것이다. 그 후 절규하고 포효하던 권씨의 음악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희망과 위로의 따뜻한 노래로 바뀌었다. 2007년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해 ‘노래는 강물처럼’ ‘밤에 달리기’ ‘지중해’등의 노래를 잇달아 만들어 발표했다.

‘밤에 달리기’는 양재천 산책로를 달리면서 떠오른 투병시절의 아픔이 멜로디가 된 것이다. 2009년에는 ‘용범밴드’를 결성하고 팝에서 포크, 록을 아우르면서 마음을 치유하는 음악을 지향하고 있다.

그의 앨범들은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내려받아 들을 수 있다. 최근에는 세계최초의 온라인 오케스트라 프로젝트인 ‘유튜브 심포니 오케스트라’서정적 즉흥부문에 자신이 연주한 동영상을 제출해 본선에 진출했다.

즉흥연주부문 18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으나 최종결선에는 뽑히지 못했다. 그는 “세계적인 뮤지션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디션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만족합니다.”고 말했다. 권씨는 시간을 내서 암 병동을 자주 찾아가 콘서트를 연다.

얼마 전부터는 소아암 완치자 모임인 ‘Rainbow Bridge’에 참여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휴먼네트워크 사업이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회원들에게 연주법과 노래를 가르치는 것이다. 매주 토요일 만나는 30여 명 중에는 KTX를 타고 오는 지방학생도 있다.

“합주실이 따로 없어 지하공간 등을 빌려 연습하는데 환경이 쾌적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유아기와 사춘기에 암을 앓아 신선한 공기가 무엇보다 필요한 이들을 지상 연습실에서 지도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연거푸 찾아온 암의 질곡을 용감하게 뛰어 넘은 권용범 씨. 훌쩍 성숙해진 그는 음악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오늘도 희망을 노래한다.  /설희관<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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