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칼럼 - 삶의 뜨락에서

▲ ◇장애인 수필가 배석형씨. 그는 인터넷라디오 음악프로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인 수필가 배석형 씨(56)가 휠체어로 외출할 때 입는 상의는 항상 파란색 등산자켓이다. 좋아하던 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인생이 뒤틀렸지만 언젠가 산마루에 다시 서겠다는 꿈의 차림새로 보였다. 배씨는 경기고와 성균관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무역회사 신입사원이던 1980년 가을 혼자 불암산 정상에 올랐다.

장애인 수필가 배석형씨의 고통감싸기
25세때 불암산 등반사고로 뇌신경마비
자판 두들겨 <아픈 것이 반갑다> 펴내
인터넷라디오 음악프로 진행자로 보람

상계동쪽으로 하산하던 중 잠시 쉬다가 좁은 틈새로 흐르는 물을 컵에 받으려는 순간, 발이 미끄러져 몇 바퀴를 굴렀다. 바위에 머리가 부딪혀 경추가 골절되고 뇌신경을 크게 다쳐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사들은 수술성공율이 20%도 안 되고, 살아나도 기억을 잃거나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50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난 그의 정신은 말짱했으나 눈을 떴을 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신경 손상으로 오른쪽 눈이 실명됐다. 왼쪽도 시야가 어두워 빨리 움직이는 물체는 지금도 분간을 못한다. 당시 청년에게는 6년 동안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버린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녀는 6개월간이나 정성을 다해 수발을 들었다.

“간호사와 환자들이 서울대병원에 열녀 났다고 했어요. 그러나 붙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순간, 라디오에서 프랜시스 레이 악단의 ‘어느 사랑의 종말을 위한 협주곡’이 흘러나왔어요.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습니다.”

퇴원 후 지팡이에 의지해 가까운 거리는 다닐 수 있었으나 1993년 지하철 승강장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병세가 악화했다. 배씨는 계간 <수필공원ㆍ1995년>과 <솟대문학ㆍ1996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2006년에는 <아픈 것이 반갑다>는 제목의 수필집도 발간했다. 컴퓨터 자판을 1분에 서너 자씩 치면서 어렵게 펴낸 책이다. 아픈 것이 어떻게 반가울 수 있느냐는 질문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이 된 후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의 처지를 비롯한 모든 것을 되도록이면 감사하고 사랑으로 헤아리려고 애쓴답니다.”

배씨는 지난해 한소울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개설한 지니 스쿨(Genie School)의 인터넷라디오 전문방송인양성 아카데미를 수료했다. 지니 스쿨은 현직 아나운서 등 방송인들이 장애인 수강생들에게 라디오 제작 및 진행에 필요한 작가ㆍ성우ㆍ아나운서ㆍ엔지니어과정을 교육시키는 곳이다. 안양시의 집에서 교육장소인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중원청소년수련관까지 주2회 활동보조인(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씨는 지난달부터 관악FM라디오(100.3Mhz)의 음악프로 ‘지니 팝스’의 진행을 맡고 있다. 지난 7일 중원청소년수련관에서 다음주 방송녹음을 마친 그를 만났다. 편안한 표정에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겨우살이 꽃을 연상시켰다.

배씨는 요즘 산이 그리우면 예전의 산행기억을 더듬어 ‘상상등산’을 한다. 지도를 펴놓고 목적지를 정한 뒤 배낭을 꾸린다. 헤드랜턴, 우비, 반합을 챙기고 지금은 광속에 처박혀있지만 애지중지하던 버너도 손질한다. 치악산, 계룡산을 오르고 설악산, 지리산의 마루금도 걷는다. 특히 지리산 세석평전의 연분홍 철쭉 꽃밭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설렌다.

5형제의 맏이인 배씨는 노모와 살고 있는데, 82세의 어머니가 폐암으로 사위어 가는데도 뛰어다니며 병간호를 하지 못하는 불효를 안타까워한다.

오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영혼을 피워내는 장애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설희관 <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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