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칼럼 - 삶의 뜨락에서

경북 봉화의 청량산(해발 870m)에서 19년째 살고 있는 이대실 씨(65)는 산악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청량산은 예부터 남한의 소금강으로 불린 명산으로 연화봉 기슭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청량사를 품고 있다.

   ◇ 서울 인사동에 나타난 청량산의 산꾼 이대실 씨. 그는 물속의 달처럼 살고 싶어한다.

청량산에서 19년째 사는 이대실 씨
도자기 굽고 목각하는 달마명장1호
‘산꾼의 집’에서 등산객에 무료 차
내년말 호반 보이는 기슭으로 이전

이씨는 청량사 아래에 지은 ‘산꾼의 집’에서 살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정자인 오산당 바로 옆이다. 그는 이곳에서 달마도와 선서화를 그리고 도자기를 굽고 목각도 만드는 자칭 ‘산허렁뱅이’이다. 달마명장 1호인 이씨는 국내는 물론 미국․호주․중국․일본 등에서 초대전을 수 차례 열었다.

‘산꾼의 집’앞에는 “약차 한잔 그냥 들고 쉬었다가 가시구려!”라고 써놓았다. 당귀․산수유․진피․대추․박하․오가피․황기․계피․감초 등 아홉 가지 약재를 넣고 끓인 구정차를 무료로 대접하는 것이다. 평일에는 하루 평균 1000잔,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2000~3000잔을 내놓다 보니 재료비만 연간 1000만 원이나 든다. 이씨는 “베풀려고 하니 때맞춰 필요한 만큼 채워지곤 한다.”고 말했다.

그 산꾼이 서울 인사동에 나타났다. 일년에 한두 번 상경하는 그를 지난 18일 인사동에서 만났다. 머리에 두른 띠와 복장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도인의 풍모에 눈빛은 밝았고 명산에서 묻어온 산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젊은 시절은 파란만장했다.

봉화에서 유기공장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이씨는 산에 다니느라 출석일수가 모자라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꿈인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무작정 상경, 충무로의 배우전문학원에서 연기수업도 받았다. 1966년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으나 4개월 만에 자퇴하고 영화 ‘청춘교실’ ‘상하이 박’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아버지 몰래 고향의 과수원을 판 돈으로 영화 ‘비 내리는 오후3시’를 감독하고 제작했으나 쫄딱 망했다. 야채도매시장에서 매일 새벽 리어카를 끌다가 아버지에게 붙들려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해준 처녀와 결혼했다.

이씨는 “혼인하기 전 아내 될 사람에게 열심히 사업해서 나 없이도 가족이 살 수 있을 만큼 되면 산으로 가겠으니 그리 알라고 말했다.” 며 옛이야기를 들려줬다. 고향에서 가까운 영양에서 사진관 조수로 2년간 일한 뒤 예식장과 미용실을 차려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1977년에는 버스터미널 근처의 논 150평을 사서 영양 최초로 웨딩전용 3층 건물을 지었다. 예식장, 사진관, 미용실, 식당 등을 두루 갖추고 예식장은 무료로 운영했다. 안동까지 입 소문이 나서 웨딩사업은 대박이었다. 1992년 부인과 동남아 여행을 다녀와 가족회의를 열었다.

부인에게는 뷔페식당을, 4남매에게는 예식장과 사진관, 웨딩숍, 미장원 등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시세로 줄잡아 20억 원이 넘는 재산이었다. 부인과 차남, 차녀는 지금도 영양에서 웨딩사업을 하고 있다. 그 해 6월 입산한 이씨는 처음 1년 동안 너무 외로워 막소주를 끼고 살았으나 어느 날 “술이 가슴속에서 눈물이 되는 느낌”이어서 그날로 끊어버렸다.

30대 중반부터 달마도에 심취한 그는 요즘도 인시(寅時․새벽 3시~5시)에 붓을 잡는다. 만물의 강이 온으로 바뀌는 우주의 기를 받기 위해서이다. 그의 명함에는 “산은 나에게 물속에 뜬 달처럼 살다 가라하네”라는 구절이 써있다. 청량산의 자유인은 그렇게 살기 위해 내년 말 안동 댐 호반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으로 거처를 옮긴다. 방 두 칸 만들 땅도 보아놓았고 산방의 이름도 ‘문패없는 집’으로 정해놓았다. 우리는 봄이 무르익으면 청량산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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