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칼럼 - 삶의 뜨락에서

사진작가 정범태 씨(83)는 40년간 격동의 현대사를 카메라에 담아온 한국 보도사진의 대부로 불린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 리얼리즘 사진을 개척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60여 년간 국악과 민속춤을 연구해 '움직이는 국악사전' '귀 명창'으로 통한다.

 국내 보도사진의 대부 83세 정범태 씨
 숱한 국제사진전수상, 사진연감에 수록
 <한국의 名舞>등 춤사위 저서도 다수
 60여 년간 국악과 민속춤 연구에 매진

그의 사진에는 진한 휴머니즘과 삶의 애환이 깔려있다. 평북 선천군 태생인 정씨는 1956년 조선일보에서 사진기자를 시작했다. 그는 부장이 되어서도 ‘독침’이란 별명을 들어가며 카메라를 메고 현장을 누볐다.

한국일보를 거쳐 1996년 세계일보를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숱한 특종을 남겼다. 1958년 아사히신문 국제사진전에 ‘말과 마부’, 미국 US카메라 콘테스트에 ‘피리부는 소년’이 입상했다. 이듬해 런던타임즈가 공모한 국제사진전에 ‘행상’이, 아사히신문 국제사진전에 ‘열쇠장수’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960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앵글에 잡은 ‘결정적 순간’은 그의 존재감을 널리 알린 작품이다. 젊은 여죄수가 재판장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방청석에서 이모 품에 있던 세 살 바기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나와 엄마의 손을 잡은 것이다. 이 사진은 아사히신문 국제사진전에서 베스트10 에 뽑혔고 세계사진연감에도 수록됐다. 정씨는 ‘쫓겨난 관광’ 필화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2년 4월 16일자 한국일보에 “폭력배 난동에 상춘객 불편”이란 제목의 기사가 현장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다. 당시 깡패 일소를 내세우던 군사정부는 그의 주장을 묵살하고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했던 것이다.

4ㆍ19혁명을 촉발시킨 유명한 사진도 있다. 1960년 4월 18일 밤 고려대생들이 청계천4가 천일백화점 앞까지 진출했다. 이때 깡패 100여명이 쇠파이프 등을 휘둘러 학생 20여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졌다. 현장에는 내외신 기자 수십 명이 있었으나 누구 하나 플래시를 터뜨리지 못했다. 정씨가 용기를 내어 찍은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전국 대학에서 데모가 들 불처럼 일어났다.

그는 4ㆍ19 혁명유공자로 뒤늦게 공적이 인정돼 지난해 건국포장을 받았다. 정씨는 1950년대 신선회라는 작가모임을 통해 사람을 주요 피사체로 하는 리얼리즘 사진을 추구했는데 처음 찍은 게 무당의 춤 사진이었다.

인왕산에 있던 굿당의 무당을 시작으로 전국의 판소리, 국악, 춤의 명인 100여 명을 찾아가 사진을 찍고 기록해왔다. 1995년 국악에 기여한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장을 받았다. 1985년부터 2009년까지 펴낸 <한국의 名舞> <춤과 그 사람> <우리가 알아야 할 예인 100사람> <한국 춤 100년> <명인 명창> 등 춤과 예인에 관한 그의 많은 저서는 국악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국의 명무>는 우리나라 전통무용의 대표 춤 꾼 1백20명의 춤사위를 찍은 것이다. 10권으로 된 <춤과 그 사람>은 이매방의 승무 등 춤사위를 담은 사진 책 <한국 춤 100년>은 춤의 전통을 이어온 20세기 예인들의 사진기록이다.

공옥진의 ‘병신 춤’을 ‘해학 춤’으로 바꾼 것만 봐도 그의 국악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작품 중 국립현대미술관에 25점,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에 15점이 소장돼있다. 정씨는 “찰나적인 순간의 포착을 위해 항상 기다려온 세월이었다. 요즘도 전통문화현장에는 버릇처럼 달려간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서산대사의 선시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이란 구절이 생각났다. “오늘 아침 눈 위에 남긴 내 발자국, 뒷사람의 길이 될지니” /설희관 <언론인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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