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m가 넘는 시커먼 물기둥이 선박들을 뒤집으며 방파제를 뛰어넘는 모습은 마치 검은 복면을 쓴 테러 부대가 성벽을 뛰어넘는 모습을 연상시켰습니다. 바닷물이 집과 배와 자동차와 나무와 온갖 쓰레기를 휩쓸어 안고 도시의 거리와 논밭으로 밀려드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물의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물은 부드럽고 생산적인 존재로서 수많은 신화와 비유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동양에서는 물이 최고의 선을 상징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 즉 최고로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할 뿐 거스르지 않고 항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얕은 곳을 향해 흐른다는 것입니다. 2700년 전 헬레니즘 문명이 꽃피기 시작할 때 그리스 7현 중 한 사람인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며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에게해에 둘러싸인 소아시아에서 살았던 자연철학자 탈레스의 사유가 지금 시점에도 그럴 듯해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 표면의 71%가 물로 채워져 있고, 또한 희한하게도 인간 몸무게의 71%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땅이라고 할 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흙입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육상 생물이 깃들어 사는 흙의 평균 두께가 1m에 훨씬 못 미칩니다. 반면 울퉁불퉁한 육지를 평평하게 깎아 바다를 메우면 지구는 깊이 3,000m에 육박하는 바다만 남는다고 합니다. 이 수치만 갖고도 지구가 ‘물의 행성’이라는 말이 실감나고 ‘물은 생명이다.’라는 수사가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원시 생명체의 출현이 바다에서 이뤄졌으며, 이를 반증하듯 인간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도 물(양수)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이번 쓰나미는 이렇게 부드럽고 생산적인 물이 문명의 파괴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물은 바다에서 산으로 거꾸로 올라갈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인간이 물을 길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오만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물을 가벼운 물질로 착각하고 삽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 물을 바라보며 물이 실제보다 무겁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상 보는 것들 중에 물보다 무거운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액체 상태인 물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갑니다. 어디든지 틈만 있으면 스며들어 갑니다. 이렇게 무거운 물에 속도가 붙어 이동하면 무서운 파괴자로 돌변합니다. 1㎥의 물은 1톤입니다.

소형차 1대의 무게에 해당합니다. 이번 쓰나미는 시속 약 60㎞의 속도로 육지를 향해 돌진했다고 하니 그 파괴력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장애물을 만나면 직접 싸우지 않고 돌아가는 물의 속성이 오히려 상상할 수 없는 깊은 파괴력을 발휘합니다. 무겁기 때문에 가벼운 것을 띄우고 밀어붙이는 물의 속성이 더욱 파괴력을 키웁니다.

동일본 대대진이 몰고 온 또 다른 재앙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이었습니다. 그 여파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지 모릅니다. 그 폭발 원인이 냉각수 공급 전원이 고장 났기 때문입니다. 물에 의해 파괴된 원자력 시설에 물(냉각수)이 공급되지 않아 재난이 확산되는 광경이 바로 물의 생산성과 파괴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합니다.

“물은 이용할 수 있어도 길들일 수 없다.” 10세기 초 일본의 시인 키노 쓰라유키가 남긴 말입니다.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 속에 발전해온 문명이 쓰나미의 물기둥 앞에 여지없이 폐허가 되어버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현대 일본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일본인만 아니라 누구나 한번 음미해볼 만한 구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김수종 전 한국일보 주필 <자유칼럼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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