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의 빛바랜 사진자료 중에는 ‘종로양복점’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서 이두용 씨(1881~1942)가 창업한 종로양복점은 중구 저동2가로 네 번째 이전해 성업 중이다. 95년 역사의 종로양복점은 종로구를 벗어나 을지로에 있는 빌딩 6층에 둥지를 틀었지만 노포의 명성을 아는 고객들은 알음알음 찾아온다

일제강점기에 보신각 옆에서 창업한
종로양복점 3대째 지키는 이경주 씨
5년 뒤에는 100년 노포 반열에 올라
입어서 편한 양복 만들기 위해 최선

이씨의 손자로 3대째 주인 경주 씨(67)가 만드는 양복의 안감 상표와 명함에는 종로를 상징하는 종그림 양쪽에 뾰족한 돌기가 세 개씩 그려져 있다. 대물림 3대의 전통과 긍지를 나타내는 징표이다.

2016년 5월이면 창업 100주년을 맞는다.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백년기업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경주 씨는 “앞으로 5년 동안 창업과 수성에 얽힌 자료를 꼼꼼히 챙겨 1세기 기념식을 조촐하게 열겠다.”고 말했다.

그의 집안은 인평대군의 후예로 서울에서 대를 이어 살았지만 살림은 궁핍했다. 창업주 이씨는 15세부터 일본인 양복점에서 어깨너머로 재단기술을 익히고 30대에 도쿄 복장학원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양복점을 차렸다.

 

 

 

 

 

 

 

◇종로양복점 3대 주인 이경주 씨가 100주년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일본상인들의 견제와 질시 속에서도 기술과 신용으로 사업을 번창시켜 한때는 종업원이 100여명에 달했고, 개성과 함흥에 분점을 둘 정도였다. 1942년 이두용 씨가 작고하자 8형제 중 넷째인 해주 씨(1996년 작고)가 대를 이었다.

해주 씨는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은행에 다니다가 부친의 권유로 일본 조지아 양복전문회사 만주지사에 취직해서 양복점 운영에 필요한 실무와 기술을 익혔다. 광복과 함께 귀국해 종로양복점 제2의 전성기를 연 그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한국전쟁 중에도 경북 경산으로 피난가서 상점 문을 열고 재봉틀을 돌렸다. 휴전 후 종로와 소공동 거리에 양복점이 잇달아 개업했지만 종로양복점이 군계일학이었다. 이시영 초대부통령, 독립투사 김석원 장군, 협객 김두한 씨를 비롯한 정재계 인사들이 단골이었다. 한 달에 200벌 이상 팔려나갔다.

경주 씨는 “아버님은 중용에 나오는 지성무식(至誠無息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을 좌우명으로 사업을 하셨다.”고 말했다. 만주에서 태어난 경주 씨는 6남매의 셋째로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부친의 권고를 받아들여 재단학원에서 기술을 배운 뒤 35세의 나이에 3대 주인이 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기성복 바람이 1990년대 들어서면서 브랜드를 내세운 대기업의 물량공세로 이어져 맞춤양복 시장이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맞춤양복을 선호하는 단골들이 전국에서 찾아와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경주 씨는 “손님의 체격과 특성을 고려해서 20가지 신체치수를 재기 때문에 개성을 잘 살릴 수 있다.” 면서 “입어서 편한 양복이 가장 좋은 옷”이라고 말했다. 종로양복점은 연중무휴 영업이 특징이며 출장주문도 받는다. 일요일에도 고객이 부르면 달려 나가 가위를 잡는다.

쉬고 싶지만 손님을 왕으로 모시는 ‘지성무식’이 가훈이자 영업방침으로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휴일에 가족과 모처럼 나들이를 떠났다가 전화를 받고 되돌아 온 적도 있다. 외국은커녕 환갑 때 가족의 성화로 부부가 다녀온 제주도 여행이 유일하다.

경주 씨는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쇼와 연도가 인쇄된 영수증 철과 부친이 일본 양복회사 만주지사에서 찍은 단체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는 남매를 두고 있는데 화가인 아들(38)은 가업을 이을 뜻이 없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부전공한 딸(34)은 직장에 다니면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딸이 4대 주인이 되면 종로양복점의 상징인 종그림에 돌기 하나가 더 보태질 것이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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