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사우와 100년 외길 ‘노포’의 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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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사우와 100년 외길 ‘노포’의 긍지
  • 설희관
  • 승인 2011.07.2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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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거리 인사동에서도 서화재료 전문점 구하산방(九霞山房·대표 홍수희·61) 만큼 전통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도 그리 많지 않다. 구하산방은 1913년 일본인이 진고개(서울 충무로)에서 개업했다. 광복 후 홍 대표의 친척인 한국인 지배인이 가게를 인수했다.

서화재료 전문 구하산방 홍수희 대표
전국의 장인과 작가 이어주는 다리역
고종과 순종이 지필묵을 공급받은 곳
문화 촉매자 자긍심으로 사양길 버텨

올해 창업 98년을 맞은 최고(最古)의 필방에 들어서면 ‘高純 御用’이라고 쓰인 편액이 보인다. ‘고순 어용’은 조선의 마지막 두 황제 고종과 순종이 이 집의 지필묵을 애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6년 전 92세로 작고한 서예가 조병호 옹이 써준 것이다.

조 옹은 3·1 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당대의 명필 오세창 선생의 수제자였다. 구하산은 9명의 신선이 교유했다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산이다. 문방사우(文房四友)인 종이·붓·먹·벼루를 비롯하여 전각과 물감 등 각종 서화재료를 취급한다.

붓 만드는 필장(筆匠), 먹과 벼루의 장인들을 작가와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100년 가까이 하고 있는 곳이다. 이상범, 김관호, 변관식, 김기창 등 내로라하는 한국화의 대가들이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지금도 작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 구하산방 홍수희 대표가 ‘高純 御用’ 편액 아래서 100년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취급품목이 1000여 가지가 넘다 보니 주인은 손님이 들어오면 무엇을 찾는지부터 묻는다. 손님이 벽면 가득히 걸린 붓 앞에서 서성거리면 용도별로 두세 자루 골라서 내놓는다. 구하산방의 서화재료는 비싸다. 그런데도 화가, 서예가, 미술대 교수와 학생들이 단골로 드나든다.

장인들의 품질 좋은 제품만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붓은 전남 광주 백운동의 진다리 붓을 명품으로 꼽는다. 백운동의 옛 이름이 진다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필공예 장인 안명환 씨(61)가 4대째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진다리 붓은 초등학교 4학년 사회과 탐구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예부터 붓의 생명인 털은 첨(尖), 제(齊), 원(圓), 건(健)의 사덕(四德)을 중요시했다. 尖은 붓끝이 날카롭고 예리하며 팽팽함, 齊는 털끝이 가지런하게 정돈됨, 圓은 붓을 먹에 적셨을 때 둥근 모양으로 회전이 잘 됨, 健은 힘이 있어 한 획을 긋고 난 뒤에 붓털이 다시 일어남을 말한다.

다람쥐(청모 靑毛), 노루(장모 獐毛) 털도 있지만, 족제비 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이 널리 사용된다. 먹은 전통적으로 울산 태화동의 태화 먹을 꼽는다. 입자가 미세해서 벼루에 갈 때 소리가 없고 부드럽다.

검은 광택이 나며 글을 쓰면 잘 퍼지고 그윽한 향기가 오래간다. 먹은 노송의 송진을 태워서 나온 그을음에 아교와 향료를 섞어 만든 송연묵(숯먹)과 오동나무나 채소의 씨를 태운 재로 만든 유연묵이 있다. 벼루는 충남 보령시 성주산의 남포석으로 만든 남포벼루 중에서도 백운상석을 최고로 친다.

문방사우는 서로 어깨동무를 해야만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먹이 없으면 벼루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고 붓을 들어 먹을 묻혔더라도 종이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컴퓨터의 보급으로 붓과 벼루 등을 만드는 장인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값싼 중국의 서화재료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국산은 경쟁력까지 잃고 있다.

홍 대표는 100주년을 앞두고 걱정이 많다. “이거 장사가 잘돼서 계속하고 있는 거 아닙니다. 장인과 작가를 잇는 문화촉매자라는 자긍심 하나로 버티고 있지요. 전통문화상품을 만드는 장인에 대한 정책적 지원과 관심, 배려가 절실합니다.”

선조들의 지필묵연(紙筆墨硯)은 키보드, 마우스, 모니터, 스마트 폰으로 급격히 대체되고 있다. 잠시 컴퓨터를 끄고 차분한 마음으로 붓을 들어보면 어떨까?  /설희관 〈언론인·시인〉

[설희관]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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