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소속 정당과 의회 다수당이 다른, 흔한 표현으로 여소야대의 정치 지형은 우리나라도 여러 차례 경험했고 그로 인한 극한 대립 상황 역시 수없이 겪었지만, 미 정치권이 싸우는 방식은 확실히 독특해 보인다.
이번 백악관(민주당)과 공화당 간 채무 한도 협상에서 느껴지는 흥미진진한 대목은 대략 세 가지다.
첫째, 대통령이 게임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채무한도확대 논의를 위해 공화당 서열 1위인 존 베이너 하원 의장과 여러 차례 만났다. 직접 협상테이블에 앉아 담판을 벌였고, 회담이 결렬되면 공화당을 맹렬하게 공개 비난했다. 사실 의회 중심 국가에 가까운 미국에서 대통령과 의회 지도자가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미 대통령이 세계에서 가장 힘있는 인물임엔 틀림없지만 의회 협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 백악관과 의회의 채널은 열려 있고 늘 가동된다.
물론 역사와 제도, 문화가 다른 미국의 정치 과정을 그대로 한국에 대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국회가 오케이하지 않는 한 성사될 수 없는 이슈(예컨대 세종시 수정안)조차 무작정 던져놓고, 되든 안 되는 여야가 알아서 하라는 건 책임 정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태도다.
지난달 27일 이명박 대통령과 손학규 민주당 대표간 회동이 2년 10개월 만에 이뤄진 영수회담이라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두 번째 낯선 풍경은 싸움의 강도다.
의회가 채무한도를 높여주지 않는다면 미국은 부도가 나고, 국가 신용등급 강등에 이어 채권·달러·주가가 폭락하는 대재앙이 온다. 세계금융시장이 함께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쯤 되면 타협을 봐도 진작 봤어야 했다.
어떤 정당도, 어떤 정치인도 ‘경제가 무너지는데…’라는 여론의 압박 앞에선 나약해질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였다면 십중팔구 이른바 ‘초당적’ 협력이 이뤄졌을 것이다.
미국 내에도 현재 정치권을 향해, 특히 백악관의 채무한도 확대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공화당을 향해 이런 비판 여론이 비등하지만, 디폴트 코 앞에서도 양측의 태도는 완강하기만 하다.
세 번째는 타협이 어려운 이유다. 어차피 채무한도를 높여줘야 한다는 사실은 의회도 잘 알고 있지만, 최종 걸림돌이 된 건 세금문제였다.
중장기적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백악관은 부자들에 대한 감세 철폐(증세)를 주장한 반면, 공화당은 증세 없이 정부 지출을 최대한 삭감해야 한다고 맞섰다. 세금이슈가 불거지는 순간,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게 미국 정치다.
사회적 지출을 늘리려면 부자들의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는 게 원래 민주당이고, 세금 늘리는 건 당의 간판을 내리는 한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본디 공화당이다.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증세-감세’논란으로 귀결되면서 채무한도 협상도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확실히 지금 욕은 공화당이 더 먹고 있다. 그런데도 세금은 흥정의 대상이 아닌, 낙태 반대나 작은 정부처럼 당의 가치이자 정체성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합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공화당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감세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어쨌든 정당이라면 이 정도로 지켜야 할 가치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건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과연 우리나라 정당에도 그런 가치가 있기는 한 걸까. 도대체 어느 당이 보수이고 어느 당이 진보인지, 또 현 정부는 무슨 가치를 지향하는지 판단조차 힘들다.
오죽하면 경제계에서 “여야 막론하고 현 정당들이 고수하는 유일한 가치는 포퓰리즘”이란 말이 나올까. 내 생각과는 다르더라도 정체성 있는 정당, 그런 정치인을 내년 대선에선 꼭 보고 싶다. /이성철 한국일보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