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저술가 이희원 박사(50)는 강원도 삼척의 덕항산(1071m) 자락에서 독일인 부인 유디트 크빈테른 씨(40)와 살고 있다. 국내 최대의 석회동굴인 환선굴에서 멀지 않은 첩첩산중이어서 내비게이션도 무용지물이다. 지난달 25일 산 아래 국도 변에서 만난 그의 차를 따라 임도를 구불구불 한참 달려 외딴집에 도착했다.

산마루를 몇 개나 넘어도 고산 포도를 재배하는 농가 몇 집뿐이었다. 부부의 보금자리는 해발 700m에서 자연과 하나 되려는 산상의 별천지였다. 북한산 백운대가 836.5m이니 어지간히 높은 곳이다. 사람과 식물이 살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고도여서 그런지 취나물, 개두릅, 곰취, 머위 등이 지천이었다.

텃밭에는 상추, 가지, 호박, 깻잎, 오이, 토마토 등이 풍성했다. 코스모스와 해바라기도 벌써 폈다. 툇마루에 앉았다. 백두대간의 줄기인 육백산(1224m)의 장엄한 능선마다 운무가 휘감겨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이곳의 해돋이와 달맞이, 낙조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 이희원 박사 부부가 100년 된 집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이 씨는 삼척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서울대 독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브레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유디트 씨를 만나 2000년 4월 결혼했다. 이 씨는 ‘예술, 앎 그리고 해방―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에 대하여’로 박사 학위(미학 전공)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부인과 함께 10년 만에 귀국했다. 한동안 강단에도 섰으나 전업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이 씨가 2009년 펴낸 <무감각은 범죄다>는 인간의 성행위를 미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국내 최초의 성(性) 미학서로 화제가 됐었다.

독일 중부의 문화도시 괴팅겐에서 성장한 유디트 씨는 서울의 갑갑한 아파트 생활을 못 견뎌 했다. 독일로 돌아갈 생각도 했다. 그녀는 4년 전 남편을 따라 시댁의 선영에 성묘를 갔다가 삼척의 산하에 매료됐다. 부부는 발품을 팔아 100년 된 화전민 집을 샀다.

방 2개를 터서 안방을 만들고 집안에 있던 외양간을 허물어 주방 겸 거실로 꾸몄다. 밖에 있던 아궁이를 거실로 들여놓고 싱크대, 냉장고도 갖췄다. 페치카에 불을 지펴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한다. 인터넷은 휴대전화로 접속해서 사용한다. 부부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운다. 된장찌개와 청국장을 좋아한다는 유디트 씨는 직접 내린 원두커피를 내놓으며 유창한 우리말로 집안 구석구석을 설명했다.

이 씨는 “2년 전 한국에 오신 독일의 장모님을 이곳까지 모신 적이 있는데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며 “그래도 풍광이 수려한 곳에서 사는 딸을 보고 안심하시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부부는 빵과 커피로 브런치를 먹은 뒤 텃밭을 가꾸고 책을 보면서 지낸다. 앞뜰의 대추나무와 돌배나무에 달아맨 해먹(hammock)과 널따란 평상은 운치가 있었다.

강릉원주대 독어독문학과 초빙교수인 부인이 강릉캠퍼스 관사에서 보낼 때는 혼자 집에서 지내야 한다. 무섭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며칠 전 잠결에 자두가 양철지붕에 ‘딱’하고 떨어져 ‘떼구루루’ 굴러 내려 머리끝이 쭈뼛해졌다”고 말했다.

이 씨는 정선군 여량면 구절리에 있는 카페 ‘오월’에서 영화 포럼을 매달 한 번씩 연다. 지난달 30일에는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주제로 참석자들과 토론했다. 정선아리랑을 낳은 아오라지 부근의 산골 다방에서 나누는 영화이야기는 애호가들이 점점 늘고 있다. 산 아래까지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그들의 깊은 산속 안빈낙도(安貧樂道)가 부러웠다. /설희관〈언론인·시인〉

※강릉원주대는 강릉대와 원주대가 최근 통합한 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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