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태인면 ‘태인주조장’ 가업 잇는
무형문화재 송명섭 씨의 죽력고 사랑
녹두장군이 마시고 어혈푼 전설의 술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 꿈


예부터 평양의 감홍로(甘紅露), 전주의 이강고(梨薑膏), 호남지방의 죽력고(竹瀝膏)를 조선의 3대 명주로 꼽았다. 죽력고는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인주조장 대표 송명섭 씨(54)가 유일하게 맥을 잇고 있다.

송 씨는 2003년 12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6-3호로 지정된 전통 술 담그기 명인이다. 죽력고는 고문헌에 뇌졸중과 소갈(당뇨) 등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다고 돼 있을 뿐 잊혀진 술이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전북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로 압송되기 전 죽력고를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필자는 지난달 28일 송 명인을 만나러 정읍으로 가면서 나이 지긋한 술도가의 장인을 떠올렸다. 그러나 명인은 젊어 보였고 활기찼다.

주조장 마당에 술독과 옹기, 소주를 내리는 소줏고리, 말린 누룩이 널려 있었다. 죽력고는 정읍 고부에서 한약방을 하던 명인의 외증조부에 이어 어머니 은계정 씨(1988년 작고)에 의해 비법이 전수됐다.

◇ 무형문화재 송명섭 씨가 전통주 애호가들에게 죽력고를 설명하고 있다.

기름 고(膏)는 한방에서 경옥고나 고약처럼 오래 달여서 찐득찐득해진 상태를 말한다. 최고급 약소주에만 붙이는 존칭이다. 죽력고를 만드는 방법은 까다롭다. 모든 증류주가 그렇듯이 먼저 찹쌀과 누룩으로 전술(밑술)을 빚어 20일 정도 발효시켜 앙금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다.

전술이 다 되면 대나무와 시누대(산죽)의 마디를 잘라 항아리에 담아 뚜껑이 아래로 가도록 땅에 박아두고 불을 지핀다. 처음에는 콩대와 왕겨를 알맞게 땐다.

불이 꺼진 항아리 뚜껑에는 진한 녹색의 대나무 진액인 죽력이 받아진다. 이 죽력을 대나무 잎에 재서 솔잎, 생강과 함께 소줏고리에 넣고 낮은 불에서 오랫동안 내린다. 전술 서 말이면 죽력고 일곱 되 정도를 내릴 수 있다.

송 명인이 죽력고를 전통 술로 빚는 데는 걸림돌이 있었다. 죽력이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약재로 등록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서울행 고속버스를 수없이 타야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동의보감, 동의학사전, 중국동의대사전 등 고문헌을 뒤져 죽력에 관련된 자료를 모조리 찾았다. 1924년 발간된 요리책 ‘조선무쌍 신식요리 제법(朝鮮無雙 新式料理 製法)’에서 죽력이 식품이라는 단서를 찾았다.

“대쪽을 불에 구울 때 나오는 진액인 죽력과 꿀을 적당히 소주병에 넣고 중탕하여 쓰며, 생강즙을 넣어도 좋다.”는 기록이었다. 무쌍(無雙)은 조선요리 만드는 법으로서는 이만한 것은 둘도 없다는 뜻이다.

결국, 10여 년 노력 끝에 2002년 죽력을 이용해 전통 술을 담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같은 해 12월 전통주 공모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고 이듬해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직접 농사지은 쌀로만 생산하다 보니 죽력고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32도짜리 700㎖ 한 병에 4만 원이다.

송 명인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생막걸리도 만들고 있는데 알음알음 입소문이 퍼져 있다. 전국의 전통주 애호가들이 태인주조장을 자주 찾아온다. 그러나 주조장에는 체험관이 없어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술 내리기 시연을 해야 한다.

송 명인은 “고문헌에 기록되어 근거가 있다는 것은 그 시대에 여러 사람이 그런 문화를 향유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며 “우리네 문화유산인 죽력고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당당히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죽력고 하나에 평생을 건 명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태인을 떠났다. /설희관〈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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