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 사회에는 희망이 넘쳤다. 그게 허망일지라도 모두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앞길이 보이지 않던 독재체제를 뚫고 민주화를 이뤄냈고, 보릿고개라는 궁핍의 시절을 딛고 산업화를 이뤄낸 한국민의 저력이자 역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희망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에는 노력하면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믿음, 자식들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민초들은 장롱에 넣어둔 금반지까지 꺼내 나라경제를 살리는데 앞장섰다. 그런데 위기 이후 세상은 더 척박해졌다. 많은 아버지들이 구조조정으로 평생 헌신한 직장을 대책도 없이 떠나야 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지겨운 학원과 과외, 허리 휘는 등록금, 치열한 스펙 쌓기를 거치고도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게 선’이라는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쳤다. 불패의 신화처럼 우뚝 솟아 있던 미국 금융시스템이 느닷없이 붕괴되면서 세계경제가 흔들렸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화가 깨지면 자각이 뒤따르기 마련. 사람들은 개개인의 내핍과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시스템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됐다.

특히 고통의 시즌이 지나가면서 중산층은 서민으로, 서민층은 가난한 계층으로 전락한 반면 재벌과 부자는 더욱 커지고 강해졌음을 발견하게 됐다. 수출이 늘고 기업들이 돈을 벌어 GDP(국내총생산)가 늘어나면 모두의 삶이 나아진다는 성장의 신화도 깨진 것이다.

과거라면 자신의 무능을 탓할 사람들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죽도록 일해도 월 100만원을 벌기 힘들고 미래도 보장되지 않는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청년들, 형편 상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데도 아이들 맡길 데도 없는 신혼부부들, 평생 열심히 살았는데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 베이비붐 세대의 장년들 모두가 사회와 국가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세상 흐름에, 민심에 누구보다 민감한 정치권은 이런 변화를 읽었다. 한나라당에서조차 보편적 복지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유다. 국가재정의 문제, 포퓰리즘의 함정 등 우려도 있지만, 큰 방향은 성장에서 복지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대선주자들은 더욱 그렇다.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는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기도 힘들고, 실제 나라를 이끌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

이 흐름에 가장 둔감한 세력이 재벌이다. 아직도 대다수 기업 오너들은 ‘돈 잘 벌고, 일자리 많이 만들면 되지 뭘 더하라는 말이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사회나 나라는 물론이고 기업과 오너 자신에게도 극히 위태로운 생각이다.

국민들의 ‘왜’라는 질문에는 쥐꼬리만한 세금을 내고 그룹을 승계하고, 출자총액제 폐지와 감세 등으로 지원해줬더니 여윳돈으로 두부나 닭고기, 어묵 등 골목상권까지 싹쓸이하는 편법과 불법, 몰상식에 대한 분노, 불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 대선주자들이 구체적인 복지정책, 재벌정책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결코 지금의 재벌을 정답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손학규 대표, 정동영 정세균 최고위원 등 야권 주자들은 물론이고 여당의 유력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까지도 대기업의 탐욕과 탈법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가 집권하든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지향할 것이고 그 목표에 걸맞게 제도적 차원의 재벌개혁을 추진할 것이다.

아마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이 사재를 출연, 재단을 만든 것도 시대변화에 화답한 ‘따뜻한 자본주의’를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그것이 본질적인 답이 되지는 못한다. 국민들은 온정에 앞서 법과 원칙, 상식을 지키는 재벌을 원하고 있다. /이영성 한국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대한전문건설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