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장공예의 명장 박호영 박인당 대표
인(印)에 인(人)을 새겨 넣는 자부심
고희 넘겨서도 조각칼로 손도장 고집
인감증명제 폐지 대신 개선책 아쉬워

사방 한 치(3.3㎝)를 뜻하는 방촌(方寸)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①좁은 땅 ②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전각(篆刻)으로도 불리는 인장을 ‘방촌의 예술’이라 했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박인당 대표 박호영 씨(75)는 방촌을 논밭 삼아 평생을 살고 있는 인장공예 명장이다.

함경남도 신흥군이 고향인 박 씨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있었다. 한국전쟁 중 거제도로 피난 가서 실향민들에게 목도장을 파주고 푼돈을 받아 생계를 도왔다. 17세 때 친척이 소개해준 서울 신당동의 도장포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여기서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김두칠 선생을 만나 9년 동안 전통 인장예술을 기초부터 닦았다.

1978년 종로의 4평짜리 가게에 박인당 상호를 내걸고 본격적으로 인장사업을 시작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박인당을 찾는 회사와 개인 등 단골이 늘어났다. 40년 동안 거래한 대기업도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의 근역인수 등 고문헌이나 자료를 토대로 서법과 도법을 연구했다.

◇ 박호영 명장이 도장포 인생 50년의 애환을 들려주며 웃고 있다.

근역인수는 조선 초기부터 광복 이전까지 서화가와 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을 모아 자료집으로 엮은 인보(印譜)이다. 여기에는 850명의 인장이 실려 있다. 그는 篆(전) 隸(예) 楷(해) 行(행) 草(초)의 각 서체 구별은 물론 제대로 쓸 줄 알아야 인장에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다며 도장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예부터 돈은 빌려줘도 도장은 내주지 말라고 했지요. 요즘은 서구처럼 서명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도장은 여전히 가장 확실한 증명과 신뢰의 수단으로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사인은 그 사람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것으로 인격을 대신하지요.”

박 씨는 2004년 기능인 최고의 영예인 인장공예 명장에 선정됐지만, 고희를 넘겨서도 문하생을 두지 않고 손도장만을 고집한다. 붓으로 한 자 한 자 써서 정신을 집중해서 조각한다. 하도급도 주지 않고 있다.

그는 도장에도 명품이 있다고 강조한다. 서(書)와 각(刻), 음(陰)과 양(陽), 수리와 오행, 장인의 서법과 도법 등이 조화를 이룰 때 길상인이 태어난다는 설명이다. 법인인감은 글자가 많으면 꼬박 하루 걸린다. 일반적인 법인인감의 인면은 지름이 18㎜이다. 그 공간에 24자까지 새겨 넣을 수 있다.

도장의 재료는 무수히 많지만 벽조목, 상아, 진옥, 물소 뿔 등을 최고로 친다.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조목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말하는데 구하기가 어렵다. 벽조목 도장은 15~30만 원이나 옹이가 들어간 것은 40~60만 원을 호가한다.

박 씨는 인장업계가 10여 년 전부터 사양길로 접어들어 고민이 많다. 정부가 1999년 인장업법을 폐지함에 따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어 위조가 쉽고 개성이 없는 컴퓨터 도장이 범람하는데다 인감증명제도를 없애려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기 때문이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도입한 인감증명제도는 사회적 비용이 연간 5천억 원에 달해 정부가 대체방안을 강구중이다.

박 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대만이 인감제도를 없앴다가 부활시켰고 일본은 국민의 편리성 때문에 존속시키고 있는 만큼 우리도 성급한 폐지보다는 인감발급 용도를 줄이고 위·변조 방지대책부터 세워야 합니다.”
인장예술의 외길을 걸어온 박 명장은 오늘도 인(印)에 인(人)을 새긴다는 자부심으로 도장을 만든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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