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6호 김진한 장인 외길 인생
충남 보령시서 3대째 100년 솜씨대물림
역대 대통령들과 교황에게 벼루 선물도
후대 물려줄 문방사우박물관 건립이 꿈


충남 보령시는 미산면과 청라면의 경계에 솟아있는 성주산(해발 680m)기슭에서 캐낸 백운상석으로 만든 남포벼루가 예부터 유명한 지역이다. 성주산에는 벼룻돌에 알맞은 수성암(水成岩) 지층이 많다. 필자는 지난 3일 무형문화재 6호 김진한 벼루 장인(70)을 그가 운영하는 한진공예에서 만났다.

김 씨는 컴컴한 작업실 백열전등 앞에서 커다란 작업도구로 가로세로 30㎝가 넘는 벼루에 십장생을 손수 조각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끌과 정을 움직일 때마다 학이 날아오를 듯했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김 씨는 전통한국연(硯)개발원을 설립, 각종 벼루를 전시하고 체험학습장도 갖춰 전통문화계승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전국 벼루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남포벼루는 현재의 청라면이 옛날에는 남포면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포석 가운데서도 백운상석의 석질을 최상으로 친다. 잡갱에서 캐낸 중석(中石)과 하석(下石)은 돌이 물러 소리가 둔탁하고 먹을 갈면 찌꺼기가 생기며 먹물도 금세 사라진다.

백운상석은 성주산의 백운사 일대에서 채석하는데 검은 바탕에 흰 구름 모양이 퍼져 있다. 벼룻돌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돌의 결이 윤기와 온기를 두루 갖춰 먹이 벼루바닥에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 것이 특징이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서유구, 성해응 등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남긴 문헌에도 남포벼루의 우수성이 기록돼 있다.

◇남포벼루 장인 김진한 씨가 전통한국연(硯)개발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특히 성해응은 “금성(金星)이 흩어져 있는 남포석 벼루는 그 덕이 구슬과 같고(其德之如玉), 한번 숨을 내쉬면 이슬이 맺힌다(噓而有泫).”라고 극찬했다.

보물 547호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의 벼루 세 개 중 두 개가 남포벼루이다. 김 씨는 100년 넘게 한길을 걷고 있는 벼루장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그의 할아버지(김형수 씨)는 조선 말기 보령에서 다듬잇돌, 맷돌, 벼루 등을 만들어 등짐을 지고 500 고지를 넘어 오일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1970년 작고한 부친(김갑용 씨)은 솜씨가 뛰어나 인간문화제도가 있기 전인 1940년대 이미 남포벼루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다.

아버지의 공방이 놀이터였던 김 씨는 14세 때부터 성주산에서 벼룻돌을 캐서 나르면서 제작기법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의 손은 굳은살투성이고 피멍든 손톱이 한두 개가 아니다. 무늬를 넣어 만든 벼루(각연)만 해도 1만 점이 넘는다.

그의 벼루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이 완상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도 천주교 측의 요청으로 지구 형상을 닮은 둥근 모양의 벼루를 만들었다. 2009년에는 일본 총리에게 선물로 증정한 벼루도 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현재까지 역대 대통령의 선물용 벼루를 도맡아 제작했다.

장인이 여생에 꼭 이루고 싶었던 벼루박물관 건립의 꿈이 최근 가시화하고 있다. 대천문화원은 지난달 26일 충남 보령시 문화예술회관에서 문방사우(文房四友) 박물관 건립을 위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선조의 예지와 숨결이 깃든 붓, 먹, 종이, 벼루를 문화유산 차원에서 계승 발전시키자는 취지의 행사였다.

김 씨는 “벼루는 단순히 먹을 가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소박한 정서와 순수함, 선인들의 생활이 담겨 있는 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김진한이란 사람은 백운상석에 수백 번의 칼질을 해서 좋은 벼루를 만든 사람이라고 후세에 전해졌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아들 성수 씨(40)는 진안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이다. 성수 씨도 벼루 제작에 관심이 많아 남포벼루 장인의 길은 4대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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