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돌’ 원고를 쓰고 있는데 핸드폰 문자 알림 소리가 났다.

“시인 이성부 님 2월 28일 별세, 빈소 혜화동 서울대 병원 영안실.” 이성부 시인(70)은 필자에게 형님과 같은 존재였다. 한국일보 선배였고 필자를 시 전문지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의 길을 열어준 글쓰기의 스승이었다.

보름 전 전화를 했으나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그때 이미 지병이 악화한 듯하다. 댁으로 연락해서 문병하지 못한 것을 뉘우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선배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등 평생 산을 사랑하던 원로 시인이었다.

한국일보 재직 시 광화문에서 바라다보이는 보현봉을 보고 가슴이 뛴다고 했을 정도였다. 백두대간은 1990년대 중반부터 구간종주를 시작해서 2004년 6월에 마쳤다. 직장 일을 끝내고 한 달에 한두 번 토요일 오후에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백두대간의 남한 쪽 종착지인 진부령에서 선배는 이렇게 독백했다고 한다. “북한 쪽 백두대간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밟아볼 수 있을지 불투명하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통일이 성취되고, 백두산까지 산길이 트일 날도 머지않으리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2009년 6월 선배와 같이 경남 산청군 거림골~세석산장~장터목산장~천왕봉~백무동계곡으로 이어진 지리산 1박 2일 산행을 잊을 수 없다. 필자의 느린 걸음 때문에 산행이 지체될 때마다 저만치 앞서 가 모퉁이에서 기다리던 선배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선배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고 재학 중에는 전국규모의 고교생문예작품현상모집에 여러 차례 장원 등으로 입선했다. 196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바람’이 당선되어 일찍이 문단에 데뷔했다.

경희대 국문과 시절인 1967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우리들의 양식(糧食)’이 당선됐다. 1969년 한국일보에 입사, 28년간 기자생활을 하고 1997년 퇴직했다.

그 후 ‘뿌리깊은나무·샘이깊은물’ 편집주간 등을 역임하고 시작(詩作)에만 전념했다. 1974년 유신체제를 거부했던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하고 문학인 101인 선언에 서명했다. 문학평론가들은 “이성부의 시에는 전라도 그중에서도 광주와 무등산, 백제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는 고향인 광주에서 1980년 5월 일어난 민주화 항쟁에 대해 일종의 부채의식이 있었다. 5.18 당시 신군부의 언론사전검열은 신문과 방송에 재갈을 물렸다. 이때 기자들은 순번을 정해 신문 발행 전의 인쇄용지(대장)를 들고 서울시청으로 가서 군인들에게 검열을 받았다.

선배는 광주현장을 떠나 검열을 받으러 다니던 죄책감으로 9년 동안 사실상 절필을 했다. 1990년대부터 시인은 산을 주제로 한 시를 계속 썼다. ‘지리산’ ‘야간산행’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도둑 산길’ 등의 산악시집을 잇달아 펴냈다.

필자는 2007년 11월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주례사를 선배에게 부탁했다. 아직도 그분의 주례사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선배는 퇴계 이황 선생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이라는 글에 나오는 ‘처음에 울적하게 막혀야 비로소 더욱 통쾌한 맛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니라.’를 인용하면서 세상살이를 산행에 비유해서 신랑과 신부에게 인내와 배려, 사랑을 강조했다.

선배의 시 ‘봄’은 해마다 이때쯤 널리 애송된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봄이 오기 전 떠나신 선배님, 영면하소서.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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