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1분기(1~3월) 성장률이 3%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對)중국 수출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중(對中) 교역량은 미국 일본을 합친 것보다 많다. 이처럼 우리 경제에 큰 파급효과를 미치는 중국은 정치는 공산주의,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재미있는 국가다.

전통적으로 상인(商人)기질이 강해 “평등의식이 강한 한국이 자본주의를 도입한 일과, 장사꾼 기질이 있는 중국이 공산주의를 채택한 일은 불가사의(不可思議)다”는 우스갯말을 들을 정도다. ‘상인(商人)’이라는 단어가 중국 상(商)나라(기원전 1762~1116)에서 기원한 말이라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중국의 자본주의는 역사가 길다. 기원전 7세기 인물인 제(齊)나라의 재상(宰相) 관중(管仲·BC ? ~BC 645)은 대표적 자본주의자였다. 그는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倉?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ㆍ창름실이지예절 의식족이지영욕)”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관중은 상공업의 육성이야말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지름길임을 잘 알았다. 지금의 산동(山東)성에 있던 제나라는 해안가를 끼고 있는 만큼 소금과 철이 많이 생산됐다. 염철관(鹽鐵官)을 두어 백성들이 만드는 소금을 국가가 수매해 줬으며, 철광 채취는 정부와 상인이 협동하는 관상(官商)협력방식을 택했다.

파격적인 것은 이익배분이었다. 이익의 7할을 백성에게 주고, 3할은 정부가 가진 것이다. 그러자, 국가의 세수(稅收)가 대폭 늘어났다. 총생산량이 많아지니 국가가 전매(專賣)할 때보다 세입이 증가하는 효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개념, 그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등소평(鄧小平)이 관중에게서 배운 것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모택동(毛澤東) 정권은 인민공사라는 협동농장 통해 농사를 지으면서 7할은 정부가 갖고, 농민에게 3할을 주었다. 중국은 내내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흉년이라도 들라치면 캐나다, 호주처럼 인구는 적고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에 손을 벌여야 했다. 등소평은 집권한 후, 관중이 했던 것처럼 농민에게 7할을 주고, 정부가 3할을 가짐으로써 대번에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생산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관중은 무역의 중요성도 잘 알았다.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비축해 두고, 소금가격이 올라가는 우기(雨期)를 기다렸다가 내륙지방에 소금을 풀어 큰 재미를 봤다. 그것을 재원으로 곡식을 시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들였다.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天災)로 식량이 부족할 때, 사들였던 곡식을 되팔아 훨씬 더 많은 이문을 남겼다.

이렇듯, 관중은 무역을 통해 식량문제도 해결하고 경제적 이익을 올렸을 뿐 아니라, 식량과 소금을 무기화하여 내륙 국가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등소평이 개방정책을 써서 대외무역을 확대하고 외국기업을 끌어들여 오늘날의 중국으로 발전시킨 것을 보면 마치 관중이 무대 뒤에 앉아 코치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지난 4월21일자 조선일보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난에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를 설명하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가장 중요한 인화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맹자(BC 372~289)는 “먹고 살 것이 없으면 떳떳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고 했고, 독일의 사회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는 “먹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도덕이다”고 했다.

맹자보다 400년 전, 브레히트보다 2600년 전에 이미 이를 간파하고 실천한 인물이 바로 관중이었다. 요즘 관중에게서 배워야 할 사람이 어찌 등소평뿐이겠는가. /조남준 전 월간조선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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