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국립공원 오대산 자락의 방아다리약수터 인근에서 26년째 민박을 하면서 6·25 때 전사한 남편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며 사는 유정렬 할머니(83)를 만났다.

할머니는 황해도 연백군 유곡면의 부농에서 6남매의 셋째로 태어났지만, 어른들의 반대로 보통학교도 나오지 못해 지금도 한글을 읽지 못한다. 그래도 경험과 아는 것이 많아 어느 누구와도 막힘없이 대화한다.

할머니는 열여덟 살이던 1946년 서울 등마루골의 땅 부잣집 맏며느리가 되었다. 시댁은 마름과 머슴을 여러 명 두고 하루에 쌀 한 가마를 씻어 밥을 지을 정도로 식솔이 많았다. 새마을운동본부가 있던 등촌동이 등마루였는데 이 일대가 모두 5대째 토박이인 시댁의 땅이었다.

바깥사돈끼리 맺어 주어 8남매의 맏이인 대학생 남편(당시 22세)의 얼굴을 결혼하는 날 처음 보았다. 결혼 3년 후 육군 사병으로 입대한 남편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1951년 2월 강원도 전투에서 숨졌다는 전사통지서만을 남겼다.

할머니는 슬하에 자식도 없이 30여 년간 시집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세 살 위의 오빠도 전쟁터에서 잃어 할머니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이 되면 상흔이 뚜렷해진다. 할머니는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자주 만나 친구가 된 또래의 미망인들과 강원도 산골여행을 자주 했다. 연금이라도 나오면 택시를 대절해서 다녔다. 지금은 120여만 원으로 올랐지만, 당시의 연금은 쥐꼬리만 했다.

할머니는 1986년 평창군 진부면 척천리에 있는 방아다리약수터를 찾았다가 오대산이 품고 있는 풍광에 반했다. 왠지 끌렸고 단박에 정이 들었다. 그래서 여동생(70)의 도움으로 약수터 아래 도로변에 있던 오두막집 한 채를 샀다. 몇 해 뒤 방을 늘려 ‘방아다리쉼터’라는 간판을 내걸고 민박을 시작했다.

현재는 700여 평의 대지에 냉장고와 주방기구를 갖춘 방이 여섯 칸으로 늘어났고 별채도 번듯하다. 손님들이 잠자리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도록 다락방에는 큰 창도 만들었다.

방아다리약수는 철분, 탄산, 이온 등의 성분이 많아 위장병, 피부병, 신경통 등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곳은 전나무 숲길을 시작으로 잣나무, 소나무, 가문비나무 등 활엽수림이 울창한 곳이어서 민박집을 찾는 이들이 많다.

약수터 근처에 여생의 터전을 마련한 할머니에게 필연과도 같은 일이 우연히 찾아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원들이 2006년 격전지였던 오대산 일대를 수색하면서 ‘방아다리쉼터’에 며칠 머물렀다.

이때 할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단원들은 끈질긴 추적 작업 끝에 남편 이춘봉 씨가 방아다리약수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씨가 소속된 부대가 고립돼 있던 북한군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발굴 작업은 올해도 계속되고 있지만 유해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할머니는 치아가 모두 온전히 성하고 보청기도 없으며 허리도 꼿꼿하다. 치약 대신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양치하고 세수를 해서 그렇다는 설명이다. 산물 속에 있는 철분 성분 때문인지 시력은 나빠져 몇 해 전부터 안경을 썼다.

평생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살아온 할머니는 빨간색 긴 치마를 즐겨 입는다. 20년 단골인 서울 동대문시장 포목점 상인들이 치마를 보내 준다. 할머니는 음식 준비를 못 해 온 손님에게는 따뜻한 밥과 산나물 무침, 직접 담근 백김치 등을 대접한다. 매달 유족연금이 나오면 쌀부터 넉넉하게 들여놓는다고 했다.

몇 해 전에는 이곳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대기업 임원 부부의 초청으로 서울에 다녀왔다. 할머니는 “이제 눈물은 말랐지만 매일 새벽과 늦은 밤에 남편이 잠든 오대산을 향해 인사드린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월정사로 향하는 필자에게도 백김치와 산나물 무침을 담은 큰 봉지를 건넸다.
종북 주사파가 설쳐대는 가운데 6·25 전쟁 62주년을 맞고 있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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