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창간된 한겨레신문이 종합일간지 가운데 최초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하기 전까지 모든 신문은 세로쓰기였으며 사람 이름과 지명은 한자를 고수했다.

지금은 기자들이 노트북으로 기사를 송고하지만, 인터넷이 없던 그때는 외근기자들이 전화로 불러주는 기사를 내근기자가 일일이 받아 적었다. 한자의 경우 진실할 允은 오징어 윤, 빛날 熙는 박정희 희 등으로 알아듣기 쉽게 불러야 했다.

당시만 해도 신문제작이나 취재 분야의 용어에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다. 검은 삼각형(▲)은 구로(くろ) 삼각이라고 했다. 선배가 기사를 송고하면서 ‘구로 삼각’이라고 하자 ‘九老 3街’로 받아쓴 새내기 기자도 있었다. 언젠가는 필자의 기사를 본 독자가 ‘벽조권 기자’를 전화로 찾은 적이 있다.

기사 말미의 내 이름 薛熙灌을 설희관이 아닌 壁照權으로 읽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모든 신문이 가로쓰기하면서도 인명은 한글·한자를 잠시 함께 적다가 이제는 모든 신문이 한글만을 쓰고 있다. 한글전용과 한자옹호를 각각 주장하는 양측의 해묵은 어문논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직 첨예하다.

2010년 복원한 광화문의 현판 ‘門化光’이 석 달 만에 갈라지자 문화재청은 지난 4월 ‘광화문 현판 글씨 및 글씨체 의견수렴 공청회’를 열었다. 광화문 현판의 글씨는 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1791~1868)이 연건도감제조(감독관)로 일하던 중 광화문 현판 사서관으로 임명되어 쓴 것이다.

균열이 생긴 현판의 ‘門化光’은 1916년에 찍은 광화문 사진 속 글씨를 복원한 것이다. 복원 이전에 걸려있던 한글 현판은 1968년 콘크리트로 광화문을 재건하면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이날 공청회에서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이사장 진태하)와 한말글문화협회(대표 이대로) 측이 극심한 논쟁을 벌였다. 진 이사장은 “광화문의 복원은 완전히 본래의 형태대로 짓는 것이므로 현판도 한자로 해야 한다.

한글로 편액을 고쳐 달자는 것은 일시적으로 왜곡된 애국심의 발동이자 국력낭비”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광화문 현판을 원형 복원한다면서 흐릿한 한자 현판 사진을 일본에서 구해와 글씨의 윤곽을 가는 선으로 본뜬 뒤 먹칠한 현판은 원형 복원이 아니라 일종의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공청회는 고함과 삿대질, 인신공격이 난무하면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났다. 문화재청은 하반기에 공청회를 다시 열 계획이다.

지난 2일 개원한 제19대 국회의원 수는 300명이다. 국회사무처에 의하면 이 가운데 284명이 본회의장에 한글명패를 내세우고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자명패를 선호한 의원은 16명에 불과하다.

국회의사당의 한글명패 확산에 이바지한 사람은 원광호 한국바른말연구원장과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이다. 김 전 고문은 1996년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줄곧 한글명패를 고집해 왔다.

원 원장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등원하면서 한글단체가 만들어준 전체 의원 299명의 한글명패를 국회의장에게 전달하려다 국회사무처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 원장은 그 후 끈질기게 국회사무처와 승강이를 벌여 본회의장과 의원회관의 명패를 한글로 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의원 배지까지 한글로 만들었으며 국정감사장에서 자신의 이름이 한자로 되어있으면 감사를 거부할 정도였다.

한글 또는 한자명패 선택이 의원들의 자율에 맡겨진 것은 제16대 국회 시절인 2004년. 이때 한자 이름이 없는 김한길 의원을 제외하면 김 전 고문과 김성호 의원 두 사람만 한글명패를 달았다. 제헌절을 앞두고 국회 본회의장의 의원명패와 광화문의 현판글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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