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일 전 몽골에 다녀왔다. 높푸른 하늘과 한적한 구름, 끝간 데 없이 펼쳐 보이는 초평선(草平線)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중국을 통해서 몽골을 알았다. 더욱이 몽골이 소련의 위성국가나 다름없는 사회주의공화국 체제였던 기간에는 직접 접촉할 수도 없었다. 자연히 몽골에 대한 지식은 단편적이거나 왜곡되거나 편집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몽골을 가리키는 몽고(蒙古)라는 말은 ‘아둔한 옛 것’이라는 뜻이다. 돌궐(突厥)은 날뛰는 켈트족, 흉노(凶奴)는 시끄러운 종놈, 이런 식으로 중국인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주변 유목민들을 비하했고,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식으로, 자신들을 뺀 나머지는 모두 오랑캐라고 불렀다.

그런 오랑캐 중 하나인 몽골 유목민들의 집에 대해서도 우리는 중국 식으로 빠오(包)라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빠오를 게르(Ger)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한 건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전천후 제작 가능하고 어디로든 이동 가능한 이 독립식 간편주택은 몽골 사람들의 생활을 잘 알게 해 주는 시설이다. 그들이 이동하는 것은 사람 때문이 아니다. 가축들이 먹을 수 있는 풀을 찾는 것이 그들의 생활이다.

추위와 바람 햇볕에 잘 견딜 수 있는 게르는 1시간 이내에 세우고 분해할 수 있다. 게르를 지을 때는 먼저 터를 잡고, 아코디언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들어진 나무벽 카나를 그 위에 세운다. 카나가 몇 개인가에 따라 게르의 규모가 정해지는데, 일반인들은 보통 5개 정도의 집을 짓는다.

귀족들은 카나를 10~12개 사용하기도 한다. 게르의 골격을 다 만든 뒤에는 눈 비를 가릴 수 있게 양모를 압축한 펠트로 카나의 겉을 덧대며 게르의 지붕을 여러 겹으로 감싼다. 마지막으로 덮는 것은 하얀 색깔의 천이다. 밤에도 잘 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우리 어른들은 흔히 “밤에 허연 것은 물이다.”라고 말했다. 물이 귀한 몽골에서는 밤에 허연 것은 물이 아니라 게르인 셈이다.

게르 짓기는 간단한 듯하지만 덮개는 혼자서 씌울 수 없어 온 가족이 달라붙어야 하며 이웃도 도와야 한다. 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맨 마지막, 남으로 문을 내는 것이다. 모든 게르의 문은 하나같이 남향으로 돼 있다. 북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고 햇볕을 잘 받기 위해서다.

그런데 몽골처녀 가이드는 “왜 문을 꼭 남쪽으로 내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해 오히려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게 했다.

그러나 남으로 문을 내는 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는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를 통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골생활의 멋과 여유를 일찌감치 배웠다. 이 시를 알려주고, 옛부터 임금님은 남쪽을 향해 앉았으며 신하들은 사약을 먹을 때도 북쪽을 향해 절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너희 몽골 사람들은 다 왕인가 보다”는 말에 그녀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사실 유목민들은 다 왕일지 모른다. 그들의 가축,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해서 그들은 다 왕일 수 있다. 그리고 집을 허투루 지으면 안 되는 그들은 저마다 능숙한 전문건설인이며 숙달된 시공자들이다.

우리가 그들과 같을 수 없고 같아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쉽게 집을 짓고 허무는, 유연하고 얽매임 없는 유목의 삶을 배울 필요는 있다. “성을 쌓는 자 반드시 멸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안주하려는 유목민을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지만, 성을 쌓고 안주하는 것은 유목민이 아니라도 누구나 망하는 길이다. 그 성이 꼭 눈에 보이는 성만 가리키는 말이겠는가? /임철순 한국일보 이사대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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