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워크’(Moonwalk)하면 마이클 잭슨을 연상할 것입니다. 발 동작이 뒤로 미끄러지는 것 같은데 몸은 앞으로 밀려 나가는 마이클 잭슨의 춤에 1980년대 세계의 젊은 여성들은 공연장에서 혼절하여 앰뷸런스에 실려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인류 최초의 ‘문워커’(moonwalker)는 닐 암스트롱입니다.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1969년 한여름 밤 흑백 텔레비전을 통해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딛고 껑충껑충 걷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닐 암스트롱이 얼마 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습니다. 한 달 앞서 미국 여성 최초로 우주여행의 기록을 세운 샐리 라이드가 61년의 생을 마쳤습니다. 20세기 후반 어린 꿈나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두 명의 롤 모델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습니다.

암스토롱과 라이드는 우주탐사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남겼지만 세상의 유혹에 곁눈질을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추구한 사람들로 미국인은 물론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도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닐 암스트롱은 자동차 운전면허도 받기 전인 15세에 비행기 조종면허증을 받았을 정도로 하늘을 나는 일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항공우주 분야 엔지니어의 꿈을 안고 있던 그는 퍼듀대학 재학 중 해군 조종사가 됩니다.

1951년 한국전에 참전하여 78회에 걸쳐 북한 출격에 나섰는데, 한번은 북한군 포격에 맞아 비상탈출을 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

제대 후 그는 엔지니어와 테스트 파일럿으로서 활약하는 등 하늘을 향한 도전을 계속했습니다. 그런 암스트롱에게 달에 첫발을 내딛는 아폴로 11호 선장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달에 발을 디딘 사람은 12명입니다. 닐 암스트롱은 첫 번째 문워커로서의 위대한 업적과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명성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미국의 영웅으로 떠오른 그를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치적으로 유혹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암스트롱은 달 착륙 후 강연여행을 다니고 항공우주국의 데스크 직책을 잠시 가졌지만 점차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해 대학교수로 조용히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사람을 싫어했습니다. 자신의 사인을 경매에 내놓아 팔아먹은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습니다. 단골 이발사가 자신의 머리를 깎아준 후 그 머리털을 3000 달러에 팔아치운 것을 알게 된 암스트롱이 머리털을 내놓든지 받은 돈을 지불하든지 하라는 요구를 했고, 이발사가 돈을 내놓자 대학에 기부했습니다.

무엇이 암스트롱으로 하여금 돈과 명성과 권력을 멀리하게 했을까요. 그의 청년 시절과 우주인의 삶을 지켜본 첫 부인 자넷 암스트롱의 회상에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암스트롱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노력한 대가로 이룩된 일에 쏟아지는 갈채를 혼자 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1983년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으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를 탔던 샐리 라이드도 명성을 타고 화려한 길을 걷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라이드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하고 우주인이 됨으로써 당시 여성에게 드리워진 유리벽을 깬 사람입니다.

그녀가 탄 우주선이 하늘로 치솟을 때 수백만 명의 어린 소녀들이 우주인이나 과학자의 꿈을 꾸며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고 당시 언론은 전했습니다.

라이드는 회고록도 쓰지 않았고 자신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드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해지는 일보다 자기의 삶을 지키며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을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의 우주인을 하늘나라로 보내며 우리가 어렸을 때 밤하늘의 은하수와 달을 바라보며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 봅니다. 암스트롱을 추모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유가족이 전했던 메시지가 짠하게 가슴을 울립니다. “맑은 밤 당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달을 보거든 암스트롱을 생각하며 한 번 윙크해 주세요.” /김수종 전 한국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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