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성주현 글 방상호 그림
“치료 시기를 놓쳤어요. 환자분은 현재 HIV 바이러스가 너무 많이 증식했습니다.”
죽음에 닿아 있는 의사의 말이 유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숱한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죽음을 준비해 왔다.
어서 죽음의 문이 열려 모든 것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 버리길 기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에게 죽음이란 결코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여성의 경우엔 더더욱.
“늦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살고… 싶습니다.”
유미가 마른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말을 뱉었다.
“T세포 수가 너무 낮아요. 지금으로선 치료 자체가 시간 낭비입니다.”
의사는 유미의 어딘가에 숨어 있을 지도 모르는 마지막 희망까지 잘라 없애려는 듯 덧붙였다.
“현재 전염성이 매우 강해요. 주위 사람들에게, 조심하십시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거대한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유미는 끝도 없는 아득함을 느꼈다.
“아직도 모르겠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게 된 거라고!”
유미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나는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꺼내어 꽉 움켜쥐었다 놓은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나는 밤업소에 나가지 않았으며 <따블 나훈아>의 녹음 스케줄도 우나 때문에 취소되었다.
근대가 열을 올렸다.
“내가 새끼야, 내가 빌려준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내가 뭐라고 했어! 처음부터 떡 배우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근대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의 수위를 높인 것은 자신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몇 날 며칠을 멍한 눈으로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나의 태도 때문이다. 평생을 지켜온 우정이라 생각했는데 단 며칠 만에 그 여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이 약 올랐던 것이다.
“말 못해 말! 무슨 말이든 해 봐!”
그때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화장기 없는 유미였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약간 초췌하진 것 빼놓고는 정말 그녀에겐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출입구에 서 있는 유미의 등 뒤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녀가 짓는 미소는 그 투명한 햇살에 닿아 있었다.
“유미 씨!”
유미는 다시 한 번 햇살만큼이나 투명한 미소로 우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작은 입을 열었다.
“우리, 여행 안 갈래요?”
우나와 유미를 태운 고속버스가 어디론가 달리고 있다.
근대는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정신을 똑똑히 차려야 한다고도 했다가 본전 생각이라도 안 나게 무조건 자빠뜨리고 보라고도 했다.
우나는 지금 이 순간 유미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했다. 옆에 있지만 그녀를 몰래 훔쳐보고 싶었다. 우나는 유미를 힐끔 바라보았는데, 언제부터인지 유미가 우나를 바라보고 있어 둘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우나가 고개를 거두기도 전 유미는 우나에게 환히 미소 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