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매주 화요일 KBS-2TV에서 방영하는 ‘1대100’이라는 퀴즈프로를 즐겨 본다. 볼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출연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분야가 한자(漢字) 문제인 것 같다.

2주 전(9월11일), 7단계 문제로 수명(壽命), 명령(命令), 명복(冥福) 가운데 다르게 쓰인 한자 찾기가 나왔다. 1명의 출연자는 두 번째를 지목하여 틀렸다. 더욱이 39명이 남은 100명의 출연자 중에서도 33명이 맞추지 못했다.

100명의 출연자는 대개 대학생, 공무원, 예선에서 엄선된 사람들이다. 그 전주에도 이구동성(異口同聲), 인사이동(人事異同), 이사(移徙) 중에서 다르게 쓰인 한자를 찾는 문제였는데, 1명의 출연자도 맞추지 못했고, 100명의 출연자도 대부분 틀렸다.

더 기막힌 사례가 있다. 2년 전, 조선일보가 서울 시내 고려, 성균관, 연세, 이화여대 4개 대학 재학생 중 한자검정시험 자격증을 가진 4학년생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쓴 학생이 31명, 대한민국의 韓자를 제대로 쓴 사람이 46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고려(高麗)의 고을 麗자를 쓴 고려대생은 65명 중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자격증을 갖지 않은 학생들을 상대로 조사했다면 이보다 더 형편없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최근 어떤 조사를 보니까, 고급문서 해독능력에서 한국이 OECD 국가 가운데 꼴찌로 나타났다. 아마도 한자 무식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영어는 배울 기회도 많고 높은 실력을 요구하는 곳도 많아 그런대로 해독능력이 있으나, 한자는 그 반대인 까닭이다. 의-약학, 기계, 전자 등 이공계는 말할 것 없고, 철학, 문학, 미술, 음악 등 인문, 예술서적은 외국 원서 그대로 보더라도 그렇고, 이를 번역하더라도 그에 해당되는 한자 단어가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지 않으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대로 50년, 100년 지나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걱정스럽다. 우리말은 약 70%의 한자어와 30%의 고유어로 이루어져 있다. 한자는 중국 글자지만 한자어는 우리말이다. 지난 2000년간 한자가 이 땅에서 통용되면서 생겨난 결과다.

고유어와 한자어로 구성된 우리말은 한글이라는 표음(表音)문자와 한자라는 표의(表意)문자 등 세계 최우수 2대 문자에 의해 떠받침을 받는 행복한 언어임을 잊어선 안 된다. 한국어는 탁월한 조어력(造語力), 묘사력, 이상적 음운 구조, 우수한 음가(音價)를 가진 세계의 어떤 언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언어(독일 어학자의 표현)로 손꼽힌다.

특히 뛰어난 우리말 조어력은 한자어의 가세로 폭발적 상승효과를 얻어 최상의 표현력을 갖게 되었다. 수식어와 용언(用言)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거의 변화가 없는 것이고, 조어력이란 명사(名詞)를 말하는 것이다.

명사란 음절이 적을수록 우수한 것이다. 적은 음절에 묘사력까지 탁월한 것이 우리말 명사다. 중요한 뜻을 담은 우리 말 명사는 해 달 별 물 불 빛 땅 흙 들 뫼 논 밭 길 돌 집처럼 1 음절어가 많고, 해님 달님 물벼 땅벼 불씨 볍씨 들깨 쇠못 품삯 닻줄 돛배 낮잠 뱃길 쑥국 솔잎처럼 기존 낱말의 조합만으로 뛰어난 묘사력과 명확한 개념을 담은 신조어를 쉽게 유통시킬 수 있다.

한자말과 어울리면 닭장(場) 밥상(床) 절구통(筒) 통(通)치마 전기(電氣)불 독(毒)버섯 동(同)아리 새벽종(鐘) 광(廣)나루 꼼수(手) 뼈대(臺) 옥(玉)수수 왕(王)초 모듬전(煎) 등이 만들어진다.

正말(거짓말의 반대)과 (물이) 잔잔(潺潺)하다, (귓가에)쟁쟁(錚錚)하다도 한자, 한글 복합어다. 여기서 나온 말이 농악놀이에 쓰이는 징이다. 한글화한 한자말이다. 순수한 우리말 같은 이런 한자어, 복합어가 우리말 속에 헤아릴 수 없이 숨어 있다. 한자는 정말 버려야 할 존재일까?  /조남준 전 월간조선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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