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성주현  글      방상호  그림

죽음을 앞둔 사람은 수없이 다짐한다. 애착을 가져선 안 된다고. 애착은 죽음을 맞이해야 할 사람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그가 이룬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유미 역시 희망이나 사랑 따위를 애써 가슴에 품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것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담담히 기다렸다. 그런 유미 앞에 우나가 나타났으며 그런 유미의 모든 것을 우나가 흔들어 놓았다.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 만큼 볼품없는 사람. 취객들의 조롱에도 씩- 하고 웃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유미는 우나가 좋았다. 우나는 마치 하얀색 물감을 들고 서 있는 페인트공 같았다. 그래서 우나는 유미의 아픈 기억을 찾아 내 그것을 치료하듯 순결하기까지 한 크림색 물감을 거기에 덧발라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살고 싶다는,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은 유미에겐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쫓으면 쫓을수록 고통만 커질 뿐이다. 그래서 유미는 애써 ‘죽음’을 외면한 채 우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의사는 마치 엄한 학생주임 선생님처럼 유미가 외면하고 있던 ‘죽음’을 그녀의 눈앞에 가져다 놓았다.

“치료 자체가 시간 낭비입니다. 그보다 지금은 주위 사람들에게 조심하라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우나를 향한 사랑도 그녀가 꿈꾸었던 행복도 의사의 그 한마디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 그것들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미는 도망치듯 우나에게서 떠나기는 싫었다. 그에게 자신이 떠나는 이유를 차마 설명할 수 없겠지만 유미에겐 ‘마지막’이 필요했다. 그 ‘마지막’ 조차 없다면 자신의 인생에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마지막’을 위해 떠난 이별 여행. 유미는 우나를 눈동자에 새겨 넣기라도 하듯 바라보았고, 우나는 언제까지라도 자신을 바라봐 줄 것 같은 유미가 좋았다.

우나와 유미.
우나와 유미는 그렇게 백양사 쌍계루 앞 벤치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나와 유미가 예정보다 일찍 서울로 올라온 것은 박감독의 꼬리를 잡았다는 근대의 전화 때문이었다. 카페에서 박감독을 발견한 이후 근대는 집요하게 그를 쫓았고 박감독이 배우 지망생인 여자를 데리고 모텔로 들어간 것을 근대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이래서 나하고 영화 할 수 있겠어?”
오디션을 본다는 말에 모텔까지 끌려 온 여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게 영화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 나 그냥 집에 가면 안돼요?”

“영화하고 왜 상관이 없어! 지금은 우리 둘이지? 실제 현장에서 배드 씬 찍을 땐 어떤 줄 알아? 연출부 애들에, 카메라, 조명, 음향까지 인간들이 드글드글 해. 그런데서 배드씬을 찍어야 한다구! 그게 여배우의 운명이요 숙명이야!”

여자는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나 싶어 겁먹은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연기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넌 내가 키워준다니까!”
이미 박감독의 손은 터질 것 같은 여자의 가슴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래, 내 말 잘 들으니까 얼마나 좋아!”
박감독의 입에서 탄성같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박감독이 본격적으로 여자에게 연기 수업을 지도해 주려고 할 때, 버럭 모텔 방문이 열렸다.

근대의 거짓말에 보기 좋게 속은 모텔 종업원이 문을 열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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