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국보로 유명했던 국문학자 무애 양주동이 책을 내면서 머리말에 ‘小春’이라고 쓴 일이 있다. 이걸 본 어떤 기자가 그 책을 봄에 쓴 것이라고 오보를 했다. 소춘은 언제인가? 음력 10월을 소춘이라고 한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에 봄처럼 따뜻한 날씨가 한동안 이어지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흔히 쓰지 않아 좀 생소한 단어다. 또 전 세계가 이상기후와 자연재해로 몸살을 겪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잘 맞지 않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말한 바대로 소춘은 ‘일상을 비트는 자연의 위트’일 수 있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를 가리키는 인디안 서머라는 말과 비슷하다. 인디안 서머는 만년에 갑작스럽게 맞게 되는 행운이나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11월 26일은 음력 10월 13일이니 우리는 지금 소춘의 한복판에 서 있는 셈이다. 지금과 같은 소춘에 전통적으로 한 일은 김장 담그기였다. 배추를 뽑고 고추를 빻고 항아리를 닦고 하는 일련의 과정은 겨울양식을 마련하는 김장이 집안의 큰일이라는 걸 알게 해 준다. 일의 순서와 김장을 담그는 규모에 일정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이 겨우살이 준비에는 온 가족의 협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시에서 김장을 담그는 집은 그리 많지 않다. 농사를 짓지 않는 데다 공과 힘을 들여 김장을 담그기가 쉽지 않고, 사서 먹는 게 더 싸고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김장독을 묻을 곳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기에 다른 일을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작업이다. 송년회가 대표적인 일일 것이다. 대개 송년회는 11월 하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집중적으로 열린다. 각종 대형 단체나 모임의 송년회를 치른 다음 12월 하순쯤이 되면 가족이나 소규모 동아리의 송년회를 열거나 조용히 지내는 게 대세가 아닐까 싶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나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납회를 한다. 앞으로 날씨가 더 추워지고 눈이라도 내리면 골프나 등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지난주 어느 모임의 골프 납회에 다녀왔다. 다섯 팀이 함께 라운딩을 했는데, 1년이 참 빨리도 간다는 소회가 올해에는 유난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럴 것이다.

그런 모임에서는 대개 한 잔씩 하면서 덕담을 주고받게 된다. 멋진 건배사로 좌중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일수록 당연히 인기가 높다. 이번 골프 납회에서는 어느 전직 장관의 건배사가 재미있었다. 그는 건배사 권유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각 대선후보 캠프에서 (나를) 오라고 하고 있지만 가지 않았다”면서 ‘남행열차’라는 건배사를 소개했다. 요즘 공무원들이 외치는 건배사라고 한다.

’남행열차’는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그런 게 아니라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기 정부에 줄을 서자!”를 줄인 말이다. 12월 19일 치러지는 18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누가 당선될지 도통 알 수가 없어 공무원들의 눈치 보기와 복지부동이 심하다. 아마도 그래서 이런 현상을 비꼬고 비틀기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낸 건배사일 것이다. “남행!” 하고 외치면 “열차!” 하고 받는 건배사다. 우리는 재미있게 웃으면서 이 건배사를 합창했다.

이래저래 올해 소춘은 명철보신의 지혜가 필요한 시기인가 보다. 한 달도 남지 않은 대선에서 과연 누가 당선되는 걸까?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차기 정부에 줄을 잘 서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런 것도 인생살이에서는 김장 담그기 비슷한 일은 아닐까 싶다. 공들이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돈으로 사서 겨우살이를 대충 하려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이지만.  /임철순 한국일보 이사대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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