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현 글 방상호 그림
너 가도벌괵이 뭔지 아니? 그래,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도 몰랐다니까. 그런데 가도벌괵이 뭐냐고? 내가 어제 점심 먹고 바람이나 쏘이려고 옥상에 갔는데 비가 내리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사무실로 돌아오려는데 저쪽에서 김민수 대리하고 제갈병철 대리가 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고. 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잖아.
그래서 살금살금 다가가 귀를 쫑긋 세워보니 제갈병철 대리가 이러는 거야. 가ㆍ도ㆍ벌ㆍ괵! 가도벌괵? 가도벌괵? 가만히 있어, 가도벌괵이 뭐지? 그렇게 막 생각하고 있는데, 김민수 대리도 그러더라고. “야, 가도벌괵이 뭐냐? 뭐가 밑도 끝도 없이 가도벌괵이야?”
그러니까 제갈 대리가 김민수 대리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 이러는 거야. “손자병법 36계 중 제24계! 기회를 빌미로 세력을 확장시킨다. 가·도·벌·괵” 그러더니 이런다. “너, 은경 씨 우산이 어떤 건지 알지?” 그러니까 김 대리가 알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라고. 그러니까 제갈 대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러는 거야. “그럼 얘기는 끝났네.” 김 대리가 그러더라. “무슨 얘기를 하지도 않고 끝났대?”

하여튼 어젯밤에 일이 생긴 거야. 내가 퇴근 준비를 하는데 감쪽같이 우산이 없어진 거 있지? 뭐? 옥이 너도 우산이 없어졌었다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내 얘기부터 해 보라고. 그래, 알았어. 옥상에서 들은 얘기도 있고 해서 김 대리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김 대리한테 “혹시 내 우산 훔쳐가셨어요?” 이렇게 물어 볼 수도 없잖아. 그래서 그냥 회사 앞에서 택시 타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나갔는데, 이건 비가 더 내리는 거야.
로비에서 쏟아지는 비만 바라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김민수 대리가 내 옆으로 오더니 보란 듯이 우산을 펼치더라고. 그리고 보란 듯이 성큼성큼 몇 발자국 걸어 나가는가 싶더니 내 쪽으로 다시 쫄쫄 돌아오는 거야. 그러더니 이런다. “서류를 놓고 와서요.” 누가 물어 봤니? 그래서 내가 새침하게 그랬지. “그럼 빨리 올라가 보세요.”
그러니까 김 대리가 뭐래는 줄 알아? 우산 없으면 같이 가재.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난 사무실 갈 일 없는데…, 그리고 우리 회사 건물 비 새요? 사무실에 우산 쓰고 가시게요?” 그러니까 김 대리 얼굴이 벌게지더라. 그러더니 그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거야. 내가 우산이 없는 것 같으니 버스 정류장까지 우산을 씌워 주겠다나. 순진하다고 해야 되니? 모자라다고 해야 되니? 그래서 어쩌긴 어째? 우산이 없는데 별수 있어? 같이 갔지.
너는, 옥이 너는 어땠어? 나하고 똑같은 시추에이션이었다고? 제갈 대리가 너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던데. 뭐래? 같이 우산 쓰고 가면서 다른 얘기 안 해? 뭐? 이탈리아에서 가장 불효막심한 사람 이름을 물어봤다고? 얘, 그 사람은 정말 불효자 얘기 아니면 할 말이 없대? 저번엔 스페인 불효자 얘기로 그렇게 구박을 받아 놓고 이번엔 이탈리아 불효자 얘기를 해? 얘,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가장 불효막심한 놈 이름이 뭐래? 뭐? 에미까고 아비치니. 허탈하다 얘. 김민수 대리나 제갈병철 대리나 둘 다 왜 그러니?
[성주현] 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