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구는 소비를 통해 표출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은 채로 끊임없이 커져만 간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새로운 물건들이 등장하고, 나름대로 혁신적인 상품들이 개발된다. 인간만이 누리는 편의에 대한 추상적인 욕망이 상품들에 의해 구체적인 욕망으로 생성되고,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욕망 조차도 여러 광고의 수단을 통해 상품들에 도취되는 과정으로 소비의 욕망으로 다가온다.

소비의 욕망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생성되지는 않았다. 광고 속에 비쳐진 섹시하고 매력적인 CF모델들이 꾸며낸 조작된 욕망을 내것으로 착각하고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다. 과연, 휴대폰을 불과 몇 년 만에 4000만이 넘게 소유하게 된 것을, 4000만의 자유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그동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곳에서 집과 자동차는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표시하고 과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소비재이자 지위재였다. 사람들은 그런 행복에 몰두하고, 또 그런 행복으로 평가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소수에게 한정되어 지위재로 표출해 왔던 소비의 욕망이, 경제주체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광고정책의 성공(사실상 한 집 건너 하나의 휴대폰 가게가 공짜를 외친다. 알고 보면 사기행위와도 같지만…)으로 인하여 휴대폰, 아니 가장 최신의 휴대폰이 그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광고는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광고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재료를 도구화하여, ‘나’를 사는 것(소비)으로 이끌고, 소비만을 하도록 프로그래밍한다. 최근에 광고는 그제품의 실용성 등을 따지기보다는 소비를 부추기는 감성에 지독하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별로 살 필요도 없는 멀쩡한 휴대폰을 두고 기능이 아니라 영상과 시각으로 투영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행위는, 어쩌면 자아의식에 대한 조롱이다.

누구든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볼 수는 없다. 단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대상을 통해서만 나를 볼 수 있듯이, 수없이 반복되는 ‘이미지’된 소비를 통해 우리는 욕망을 상품으로 소비하고 채워 나가는 수동적인 존재로 변모한다.

사람들은 욕망을 비우지 않는 이상 채워지지 않는다. 비록 그 욕망이 우리의 생활을 구성해 온 원동력일지라도 궁극적인 대상은 아니다. 결국 욕망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또 다른 욕망이 다시 꿈틀거리는 큰 고통이 다시 수반되기 때문이다.

소비를 통한 욕망의 유통기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짧아지고(비록 그 욕망의 유통기간은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묘하게도 새로운 상품이 그 기간을 단축한다), 또 반복될수록 더욱 비싼 욕망을 갈망하는 것이 사실이다(여기서도 주목할 점은, 소비로 따라가면 상류계급은 더 비싼 상품으로 도망가서, 소비의 계급, 욕망의 계급은 결국 제자리 한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처럼 착각하는 보편적인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현대사회는 소비사회이고 그 과정을 일탈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러나 소비, 특히나 명품소비는 상류계급을 따라잡기 위한 모방행위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 욕망의 본질을 스스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  /김용상 코스카 중앙회 기획관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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