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이글.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기세로 내리쬐던 하늘의 기세가 어느새 한풀 꺽여 순하디 순한 부드러움을 되찾은 듯하다. 세월은 거스를 수 없다 하였는데 요즈음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오갈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곤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삼천갑자 동방삭’이 아닌 이상은 세월의 흐름을 반길 수도, 원망할 수도 없음이니 예로부터 그저 더해지는 세월의 무게에 대한 소회를 논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이 나이에 따른 삶을 대하여야 하는 자세에 대한 것이다.

그중 나이 오십이면 하늘의 뜻을 안다 하여 ‘지천명(知天命)’이라 한다.
최근 언론에서 최고의 화제를 낳고 있는 모 정당의 국회의원도 지천명을 조금 지난 나이인데, 그는 과연 하늘의 뜻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자신의 신념대로 하는 것만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많은 동조자들, 추종자들과 함께 세상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인상을 받은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
하나같이 다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념 없이 사는 사람이 세상을 허투루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거슬러 역행하는 신념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지천명(知天命)’을 지나면 그 다음 순서는 ‘이순(耳順)’이다. 육십 나이면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나이다. 옛말 그른 것이 하나도 없다 하였는데 어째 그 말은 틀린 것 같기도 하다. 일부 지천명을 지나 이순에 가까워지는 사람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과연 하늘의 뜻을 알고 만물의 이치를 터득하여 듣는 것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 저럴 수도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해보다는 집착과 아집에 사로잡혀 세상을 듣고 보는 것이 더 좁아지는 사람들이 주위에 더 많은 듯하여 안타깝기까지 하다. 나 또한 ‘이순’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이이다. ‘지천명’은 지났으니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할 텐데 그러지는 못한 것 같고, 다만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곤 한다.

곧 다가올 ‘이순’에는 만물의 이치를 터득하여 도인의 경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지 못할 바에는 세월의 두께를 남들이 알기보다는 오히려 세월의 흐름을 역행하여 흐려지고 좁아진 스스로의 내면을 갈고 닦아야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 뜻과 변함없이 흘러가는 세월이지만 그 흐름만큼 마음의 곳간이 넉넉해지길 바라는 것이 큰 욕심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어느덧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었으니 곧바로 무시무시한 동장군을 대동한 겨울이 올 것이다. 또 이어서 꽃피는 봄도 올 것이고.

‘이육사의 광야’의 한 소절이 생각난다.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김재갑 코스카 세종시·충청남도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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