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감상(5)

야정인한독폐문 夜靜人閑獨閉門
반등간역대유헌 伴燈看易對幽軒
독래부각매화락 讀來不覺梅花落
비박상두점소흔 飛撲床頭點素痕

고요한 밤 한가로워 홀로 문을 닫아걸고
등불 짝하여 주역 읽으며 그윽한 헌창 마주하네
글 읽느라 매화 꽃잎 지는 것도 못 느꼈더니
책상에 날아들어 하얀 흔적 한 점을 남기었구나

밤이다. 빛과 색이 사라지는 밤은 소리의 세계다.
나뭇잎과 풀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 하늘에서 내려 만물을 적시는 빗소리, 풀숲이나 뜰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열을 지어 날아가며 우는 기러기 소리, 야경꾼이 순찰하며 내는 딱따기 소리, 수심을 달래는 듯한 피리 소리, 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그리고 여염집 아낙들이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 밤에는 눈보다 귀가 더 밝은 법. 밤이 내는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상념에 잠기게 한다.

그런데 밤이 고요하다.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는다. 생명의 노래를 부르던 동식물들은 모두 잠이 들고 주위를 지나다니던 이들도 몸을 눕히러 돌아갔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어버린 밤. 적정의 물결에 몸을 맡긴 채 시인은 등불 밑에서 ‘주역’을 읽는다. ‘주역’의 철리를 음미하며 얼마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일까? 은은한 매화 향기를 느껴 눈길을 돌리니 책상 언저리에 어느새 매화 꽃잎 하나가 내려와 앉아 있다. 마치 시인에게 천기를 누설하려는 듯이.

밤은 계절과 날씨, 장소에 따라 수만 가지 다른 형상과 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저녁 일찍 곤히 잠든 이들에게 밤은 그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밤은 반가운 벗과 술잔을 기울이게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게 하고, 책을 읽으며 옛사람과 이야기 나누게 한다. 오늘 밤은 또 무슨 모습으로 나를 찾아올른지.   <출처:한국고전번역원 한시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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