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천 세계일보 기자

 
현대건설 620억원, 대림산업 527억원, 대우건설 423억원, 삼성물산 374억원….

수주액이나 영업이익 액수가 아니다. 이들 건설사가 최근까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부과받은 ‘담합’ 과징금 액수다. “아파트 짓고, 해외 수주해서 돈 벌어 과징금 내면 ‘땡’”이라는 말이 나온다.

엄청난 액수의 벌금에 허덕이다 보니 요즘 사석에서 만나는 건설사 임원이나 직원은 불만이 가득하다. 한 건설사 간부는 “정부가 ‘뻘짓’만 한다”고 분해했다. 전·월세 과세강화 대책으로 부동산 경기 회복의 맥을 끊은 것이나 공공공사에 참여한 건설사에 과징금 ‘폭탄’을 매기는 것이 이들이 보기엔 정부의 ‘헛발질’이다. 건설사는 현재의 과징금 사태를 ‘두더지 잡기’ 게임이라고 표현한다.

먼저 걸리면 두드려 맞고, 아직 구멍 위로 얼굴을 내밀지 않은 두더지(건설사)라도 언젠가 반드시 머리를 들 것이기 때문에 망치질을 당한다는 것이다. 맞아도 다시 머리를 내밀어야 하는 두더지처럼 건설사는 정부에 저항할 수 없다는 자괴감도 배어 있다.

과징금이 일부가 아닌 전반의 문제라 상황이 더 심각해 보인다. 대형 건설사에 최근 2년간 부과된 과징금 누적액이 4500억원을 넘어섰다. 현재까지 100대 건설사 중 46개사가 과징금을 맞았다.

더 큰 문제는 폭탄이 앞으로도 계속 될 거란 점이다. 공정위는 호남고속철도 등에 대한 담합 조사를 진행 중이다. 그동안의 업계 관행으로 볼 때 과징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터다.

담합 판정을 받은 건설사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담합은 무조건 잘못이다. 다만, 우리 공사판의 수·발주 시스템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한번쯤은 짚어볼 때가 된 것 같다. 정부가 실적을 내기 위해 공기를 짧게 잡아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또 이를 위해 공구를 쪼개면 건설사도 경쟁사의 움직임을 파악해 입찰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발주처인 조달청과 공정위의 시각차도 여러 건설사가 지적했다. 한 건설사 임원은“‘담합하라는 건 아니지만 조달청이 알아서 (공구를) 잘 나누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한다”며 “잘해야 2∼3% 마진 먹겠다고 경쟁하면 적자 나는 시스템을 조달청은 아는데 공정위는 모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저가 위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발주 시스템이 담합을 조장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처음부터 상당한 부담을 안고 시작하는 건설사가 위험 분산을 위해 밀약의 유혹을 떨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턴키 입찰방식도 손봐야 한다. 관급공사의 경우 설계와 조달, 시공을 한꺼번에 일괄 입찰하면 설계비만 최대 100억원 가량 들어가는데 입찰에서 떨어지면 건설사는 이 돈을 그냥 버려야 한다. 설계 능력이 없는 정부가 건설사에 부담만 지우고 책임은 안 진다는 비난이 인다.

재차 강조하지만 담합은 범죄다. 하지만 죄를 지은 건설사들이 자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그냥 ‘적반하장’으로만 보기엔 뒷맛이 개운치않은 느낌이다.

지금이 기회다. 정부와 건설사가 머리를 맞대고 불필요한 제도를 개선하고, 공정 경쟁을 위한 명백하고 구체적인 제재와 자정 기준 등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건설사가 휘청할 정도로 부과된 과징금이 그 값어치를 하게 된다. 노대래 공정위원장이 건설사와의 간담회에서 “서로 윙크만 해도 담합”이라고 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우리 건설사 수준이나 인식은 그에 한참 못 미친다. 우리 건설 문화의 혁명적인 변화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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