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보고서 작성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신한다. 형식에 맞춰 보고하고, 뭔가 있음직하게 말을 만드는 것은 꽤 잘했다. 그 재주는 군시절에 빛을 발했다. 상급부대에서 내려오는 각종 요구에 걸맞는 보고서를 척척 만들어냈고, 그 공로로 적잖은 상을 받았다.

보고서라는 게 사실 별 것 없었다. 예컨대 환경정리 주간에는 장병들을 내보내 부대 앞을 잠시 쓸도록 하고 그걸 사진으로 찍어 증거를 남긴 뒤 그럴싸한 설명을 남기면 된다. 내 부대 앞 쓸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 장병들에 끼친 영향, 민간인들의 평가 등 정해진 양식이 있었다. 거기다 내 부대 앞 청소하기 웅변대회나 백일장 행사까지 덧붙이면 금상첨화였다. 상급부대는 그 보고서를 보고 해당 부대와 해당장병을 표창했다. 부대 앞 쓸기는 한 보름 정도 한 뒤 흐지부지되지만 뭐랄 사람이 없었다.

‘보여주기식 보고서’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관료들을 만나면서다. 과천정부청사부터 세종정부청사까지 10년 가까이 부처출입을 하면서 매일 접한 보도자료에는 군 시절 내가 작성했던 보고서의 향기가 났다. 올 들어 정부가 발표하는 각종 대책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2월 중순 이후 정부가 쏟아낸 굵직한 대책과 보고만 4번. 2016년 경제정책방향, 대통령업무보고, 미니 부양책, 그리고 9차 무역투자진흥회의 등으로 보름에 한 번꼴로 40~50페이지짜리 대책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발표된 대책들은 신문 1면과 TV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하지만 알토란 같은 대책은 얼마 없었다. 2016년 경제정책방향과 대통령업무보고는 사실상 같은 내용이었다. 2016년 한국 경제를 이렇게 운영하겠다는 것이 경제정책방향이고, 이걸 보고하는 게 대통령 업무보고이니 다를래야 다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관료들은 “뭔가 다른 게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며 머리를 짜냈다. 그리고 보름 뒤 나온 미니 경기부양책. 하도 담을 게 없다 보니 영화관·스키장·테마파크에서 할인행사를 실시하고, 경제6단체장과 간담회를 개최하겠다는 내용도 주요 정책과제에 포함됐다.

지난 17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9차 무역투자진흥회가 열렸다. 규제개혁을 타파한다는 이 회의에서는 공유경제와 스포츠산업 활성화가 부각됐다. 공유민박에 대한 법을 제정하고, 그린벨트를 풀어 체육시설을 짓는다는 것이 골자였다. 내용의 적절성은 접어두고라도 대통령이 주재하기에는 분명 격이 떨어지는 주제들이다. 이걸로 2%대로 떨어진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두자릿 수 줄고 있는 수출 감소를 막고, 눈덩이처럼 커진 가계부채를 줄이고, 치솟는 전세값을 안정시키기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지난 23일 국무조정실은 2015년 정부업무평가를 발표했다. 기재부, 미래부, 산업부, 고용부는 ‘우수’하다고 했다. 무려 600여 명의 민간위원이 투입돼 국정과제, 규제개혁, 정책홍보, 정상화과제를 얼마나 잘했는지를 들여다 봤다고 했다. 보나마나 평가항목을 잘 메꾼 부처가 높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만약 경제성장률과 고용률, 실업률, 가계소득, 물가, 주택매매가 등 경제지표가 반영이 됐더라면 이들 부처가 높은 점수를 받을리 없다. 경제는 나쁜데 정부만 잘했다고 하는 괴리도 여기서 생긴다.

정부는 정책 발표도 많이 하고, 정말 신경도 많이 썼는데, 국민들이 통 못 따라오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마나한 면피성 대책이어서 애초에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 정책들이었을까. 관료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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